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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3-08-22 10:11:49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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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광영(1905-1990)
운청으로 불렸으며 광동성 문창현(지금의 해남성 문창시) 사람이다. 1929년에 광서 우강 백색에서 중국로농홍군 홍7군에 가입하고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강서쏘베트구역에서 제3차, 제4차, 제5차 반‘포위토벌’에 참가하고 장정의 길에 올랐다. 1945년 4월,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에 참가했다. 1945년 8월, 운광영은 길림성 연변지구에 전근되여 중공화룡현위 서기로 지냈다. 1948년 가을, 중공연변지위 부서기 겸 조직부 부장으로 되였다. 1949년 이후 중공광동성정부 비서장, 광동성당위 상무위원, 광동성검찰원 당조서기와 검찰장을 력임했다. 1990년 6월, 운광영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24년, 광주시광아학원에 입학한 운광영은 반제반봉건투쟁에 적극 참가했다. 1925년 5월, 운광영은 광서 남녕으로 건너가 공산당원 장운일의 추천으로 리명서가 수정 사령으로 있는 부대에 정치부 문서로 채용되면서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 1929년 12월, 백색봉기가 승리하고 중국로농홍군 제7군이 설립되자 운광영은 전우들의 추천으로 우강 백색에서 홍7군에 가입, 군경리처에 배치되였고 1930년 4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년 가을, 홍7군은 등소평, 장운일의 령도 아래 강서성 숭의현, 흥국현에서 중앙홍군과 승리적으로 회합했다. 회합 후 운광영은 선후로 7군 정치부, 조직부 부장, 홍3군 제1사 2퇀의 정치위원, 특과학교 정치부 교원 등을 력임했으며 강서쏘베트구역에서 제3차, 제4차, 제5차 반‘포위토벌’에 참가한 뒤 장정의 길에 올랐다. 1935년 11월에 홍군대학 정치부 조직과 과장으로 부임했고 1936년 6월에는 광동성 진제당과 광서성 리종인, 백숭희와 련합하여 일본과 장개석을 반대하는 ‘량광사변’을 일으켰다. 운광영은 중공중앙의 위탁을 받고 비밀리에 리종인, 리제심 등 사람들의 통일전선 사업에 종사했다. 1936년 9월, 그는 광주를 떠나 연안으로 돌아왔다. 1937년 봄, 연안 항일군정대학 제1기 학습기간에 그는 당중앙의 파견으로 향항에 가서 지하당조직을 세웠다. ‘7.7사변’ 후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광주에 팔로군 판사처를 설립하고 판사처 주임을 맡았다. 1943년 봄부터 1944년 겨울까지 중앙당학교에서 정풍학습에 참가하고 이후 중앙군위 편역국 부국장 겸 로씨야어학교 부교장이 되였다. 1945년 4월,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에 참가했다.
1945년 8월, 운광영은 길림성 연변지구로 전근되여 중공화룡현위 서기를 맡았다. 그는 화룡에 도착하자마자 정무회의를 열어 ‘신민주주의를 토대로 한’ 시정방침을 제기했다. 그해 11월 19일에는 여러 민족 각계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현정무위원회의를 열어 화룡현정부를 새로 세웠다. 운광영은 현내 토비들을 숙청하고 토지개혁 등 사업을 전개했다. 1948년 6월, 전 현 농촌인구의 53%를 차지하는 빈고농들이 토지를 분배받아 진정으로 ‘농사 짓는 자가 자기의 논을 소유하게’ 했다. 1948년 가을에 중공연변지위 부서기 겸 조직부 부장으로 되였다.
1949년 6월, 길림성당위에서 남하간부대대를 조직했는데 운광영은 인솔자중 한명이였다. 1950년, 그는 광동성정부 비서장 겸 성정부 직속기관당위 서기로 전근했다. 1952년부터 1957년까지 광동성 상무위원과 성검찰원 당조서기, 검찰장을 력임했다. 1990년 6월 9일, 운광영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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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룡(1919-1992)
조선족, 1919년 5월 21일에 길림성 룡정시 동성용진 영성촌에서 태여났다. 1947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20세기 40년대말부터 50년대까지 이어진 농촌사회주의개조에서 김시룡은 동북 최초로 농민을 조직해 농촌생산력의 발전을 추진했으며 전국적으로 유명한 농촌사회주의 호조합작화운동의 선도자로 되였다. 김시룡은 전국로력모범, 길림성특등모범으로 평의되였고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기, 제2기, 제3기 대표,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주석단 성원, 제5기 전국정협 위원으로 선거되였으며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27차례 받았다.
1946년 3월, 김시룡은 촌민들에 의해 빈고농단의 조장으로 선거되였는데 여섯 가구의 농민을 조직하여 로동호조조를 만들고 공동치부의 길을 가는 데 앞장섰다. 이는 연변지구의 첫 농업생산호조조로서 사람들은 이를 ‘김시룡 호조조’라 불렀다. 1947년, 김시룡은 림시 호조조의 경험을 총화하여 장기 호조조를 건립할 새로운 구상을 제기했다.
1948년, 김시룡은 전 촌의 13개 호조조를 5개 련합생산 호조조로 묶고 호조련조의 조장을 맡았다. 그해 연변지구는 자연재해로 인해 각 농촌지역이 전반적으로 산량이 줄었으나 김시룡의 장기 호조조는 농업 위주에 농부산업을 결합하여 자체 생산능력을 강화한 덕분에 흉년에도 감산하지 않은 데다 수입도 안정적이여서 광범한 농민들의 찬사를 받았다.
각 농호의 로동공수의 불균형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김시룡은 비교적 합리적인 방안인 ‘표준공제(标准工制)’를 내왔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 몇년간의 호조합작 경험을 열심히 총화하여 ‘산량보증제’를 제정했다.
‘표준공제’와 ‘산량보증제’는 당시 우리 나라 농민들이 토지사유제에 근거한 호조합작로동에서 수익을 분배하는 데 적합한 방식이였다. 이 분배방식은 농민들의 토지소유권을 존중하고 많이 일하면 많이 받고 로동에 따라 보수를 받는 원칙을 구현했으며 농민들의 생산 적극성을 불러일으켜 생산력의 발전을 추진했다. 1950년, ‘산량보증제’가 실행되면서 농민들의 적극성은 왕년보다 배로 제고되였고 ‘표준공제’의 실행이 농민들에게 더 할 나위 없이 큰 혜택을 주면서 총 11만 2450킬로그람의 산량을 내여 왕년보다 49% 증산했다. 그해 김시룡 농업생산호조조는 길림성 1등 모범호조조로 평의되였을 뿐만 아니라 김시룡도 전국로력모범 기준병의 영예를 지니고 북경의 국경관례대회에서 모주석의 접견을 받았다.
1951년은 흉년이 든 해이지만 김시룡의 농업합작사는 지경을 타파한 통일경영의 우월성을 충분히 발휘하고 산량을 늘이기 위한 새로운 조치를 취했기에 벼 수확량이 헥타르당 3865킬로그람으로 전해보다 16% 이상 증산했고 한전은 헥타르당 2680킬로그람으로 전해의 2배 가까이로 증산했다. 김시룡 초급호조합작사는 농업부로부터 전국 ‘전면풍작모범합작사’로 선정되였다.
김시룡은 어린시절 집이 가난해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새 중국 창건 이후 문화가 없는 고생을 겪자 마음을 다잡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 매진했다. 또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야학에 다니게 하여 온 마을에 문화를 학습하는 열풍이 일었다. 덕분에 영성촌은 1957년에 문맹을 퇴치하고 소학생 학교 입학률이 100%에 달하게 되였다. 김시룡은 쏘련에서 견학하는 동안 농업기계화의 발전을 직접 확인하고 농민들은 문화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농민들 자신의 기술자를 길러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김시룡은 1958년 전국문맹퇴치사업회의에 참석해 <농민들은 문화가 필요하며 농민은 문화를 배울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국무원 부총리 겸 전국문맹퇴치위원회 주석 진의는 총화연설을 할 때 김시룡의 발언에 중시를 돌리며 그에게 돌아가서 농민대학을 설립하라는 임무를 맡겨주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시룡은 중공연길현위와 중공연변주위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교실이 부족하고 경비가 부족한 등 각종 곤난을 이겨내고 1958년 5월 1일에 연길현 동성용향에 새벽업여농민대학을 설립했다. 이는 전국에서 첫번째 농민대학이였다.
당이 령도하는 농촌민주개혁실천에서 김시룡은 농민의 리익을 수호하는 면에서 부단히 개척, 진취했고 농촌사회주의개조 과정에서 당의 방침과 정책에 따라 농민문제의 근본인 토지문제를 틀어쥐고 용감하게 사고하고 대담히 실천하며 군중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호조조로부터 초급농업생산합작사, 연변 최초의 인민공사를 설립함으로써 농민들을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었다.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농촌사회주의개조운동의 훌륭한 인솔자, ‘우수한 농촌간부이자 충실한 공산당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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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빈기(1917-1994)
본명은 장박군이며 길림성 훈춘현에서 태여난 저명한 작가이다. 193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절강성 승현현위 선전부 부장이 되였다. 1939년, 동북항일의용군의 투쟁을 담은 장편소설 《변경선에서》가 문화생활출판사에서 출판되였다. 1949년, 락빈기는 북평에서 열린 제1회 전국문학예술사업자대표대회에 참석했고 선후로 산동성문학예술계련합회 부주석, 중국작가협회 북경분회 부주석, 중국문학예술계련합회 제4기 위원, 중국작가협회 제3기, 제4기 리사를 력임했다. 1994년 6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17년, 락빈기는 길림성 훈춘현에서 태여났다. 13살 적 소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는 마침 북경향산자유원을 졸업한 교원을 새로 초빙했다. 그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락빈기는 혁명의 계몽을 받았다. 1933년, 락빈기는 북경대학 방청생으로 공부하게 되였다. 그때 읽은 레브 똘스또이와 고리끼의 작품에 흠뻑 매료된 그는 중국의 운명을 위하여 글을 쓸 사명감을 지니게 되였다. 1935년, 락빈기는 할빈에서 김검소 등 좌익 문예청년들을 만났는데 그 뒤 상해로 가서 로신을 대표로 하는 좌익 문예진영에 가입했다.
이 시기에 그는 ‘락빈기’를 필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봉화》, 《납함》 등 신문과 간행물에 항일전쟁을 반영한 수많은 보고문학을 발표했다. 나중에 이 작품들을 묶은 《대상해의 하루》는 문학전선에서의 그의 첫 웨침이였다. 1937년 12월, 락빈기는 절강성 승현으로 가서 항일구국선전을 하다가 1938년 4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승현현위 선전부 부장으로 되였다. 1939년 11월, 동북항일의용군의 투쟁을 다룬 장편소설 《변경선에서》가 문화생활출판사에서 출판되였다.
이후 락빈기는 계림, 향항, 중경, 상해 등 지역에서 전전하며 좌익문학활동을 이어갔다. 이 기간에  단편소설 《북망원의 봄》, 자전체 장편소설 《강보외의 가족사》 제1편 <혼돈>, 중편소설 《오비유》, 《죄증》, 단편소설 《고향사람 강천강》, 신화 《푸른 두만강》, 극본 《오월의 라이라크》와 《소홍소전》 등을 창작했다.
1949년 7월, 락빈기는 북평에서 열린 제1회 전국문학예술사업자대표대회에 참가했고 그 후 인민일보에서 근무하다가 산동성문학예술계련합회 부주석으로 부임했다. 1953년, 락빈기는 북경영화제작소로 자리를 옮겨 창작에 매진했다. 그는 여러차례 길림성 교하현의 한은 호조조에 가서 생활을 체험하며 동북의 농촌생활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을 여러편 창작했다. 1962년, 락빈기는 북경시문학예술계련합회로 전근되였고 북경시작가협회 부주석을 담임했다. 이 기간 그는 《왕어머니》, 《부녀간》, 《거래》, 《년휴가》, 《산간 수매소》 등 단편소설을 창작했고 단편소설집 《로위준과 방방》을 출판했다. 이러한 소설들은 다양한 각도와 묘사기법을 능숙하게 활용하여 실제생활을 반영했는데 편집이 절묘하고 필체가 섬세하고 인물형상이 생동하며 선명한 지역적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1974년, 북경시문사관에 배치된 그는 고대문자에 농후한 관심을 갖게 되였다. 그는 반신불수, 시력감퇴 등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며 고대문자학 연구를 시작하여 《금문신고》 2권을 펴냈다. 그는 허신의 《설문해자》 기법을 응용해 고대 금문의 형의음적 특성과 변화를 분석하는 한편 력사문헌과 련계시켜 문자의 구체적인 원시적 함의를 고증했다. 특히 ‘족표씨지(族标氏志)’설을 제기하여 부족의 성을 나타내는 일부 한자를 해석하면서 고대문자학 내용을 풍부히 했고 중국 상고사 연구를 새롭게 개척했다.  
락빈기의 주요 저서로는 《락빈기 단편소설선》, 《시경신해와 고사신론》과 《경박호반》 등이 있다. 1994년 6월, 락빈기는 세상을 떠났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사명》에서 발취
(다음기 계속)
오수란 편역
작가:장홍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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