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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2-08-11 13:56:15 조회

 
 
(전호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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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숙(1915-1939)


녀, 조선족, 안도현 차조구에서 태여났다. 1933년 8월 연길현 반일유격대에 가입하고 193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9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13단 기관총반 반장이다. 뛰여난 사격실력으로 번마다 전투임무를 출중하게 완성해 ‘녀명사수’라고 불렸다. 1939년 8월 27일, 안도현 대사하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적에게 체포되여 적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됐다.
 

허성숙은 1915년 길림성 안도현(원 연길현) 차조구 중평촌에서 태여났다. 소학교 3학년까지 공부하고 조선혁명가들이 꾸리는 야학에 들어갔다. 1930년, 15살이 된 허성숙은 마을에서 조직하는 반일활동에 참가했으며 이듬해 소년선봉대에 가입했다.
1933년, 허성숙은 영광스럽게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해 반일투쟁에 적극 참가했다. 그의 아버지 허기형은 괴뢰자위단 단장을 맡고 자주 일본괴뢰군을 배합하여 반일유격대를 공격했으며 허성숙을 마을의 반일활동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허성숙은 아버지의 후안무치한 행동에 몹시 분개했으며 이에 사상교양을 진행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허성숙은 아버지와 부녀관계를 끊고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이해 8월, 그녀는 옹구(지금의 안도현 명월진)에 가서 연길반일유격대에 참가했다.
1934년 7월의 어느 날, 유격대는 중평촌 부근의 한 산에서 허기형 괴뢰자위단 대오와 맞닥뜨렸다. 허성숙은 분노에 차 위엄있는 목소리로 웨쳤다. “총부리를 적에게 돌리시오! 우리 유격대와 손을 잡고 일본침략자들을 물리칩시다!” 탄알이 비발치는 전장에서 아버지를 마주하고 허성숙은 견결히 항일민중의 편에 서서 일본 앞잡이에게 증오의 총탄을 발사했다. 괴뢰자위단은 유격대의 공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으며 간사하고 교활한 허기형은 격전중에 몰래 도주했다.
1934년 겨울, 허성숙은 병 때문에 연길현에 남아 사방대청년단구위의 부녀사업에 참가하게 되였다. 어렵고 곤난한 시기에도 그는 시종일관 왕성한 혁명투지를 잃지 않았다.
1935년, 허성숙은 신체가 조금 호전을 보이자 곧바로 부대로 돌아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단 1련의 기관총사수로 되였다. 그해 그는 1련 련장 박광규 동지와 부부가 되였다. 1936년, 허성숙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6월, 그는 림강묘령전투에 참가하고 7월에 안도전투에 참가했으며 1937년에는 삼간봉전투 등 전투에 참가했다. 허성숙의 사격실력은 매우 뛰여났으며 매번 전투에서 우수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동지들은 그를 ‘녀명사수’라고 칭찬했다.
1937년 9월, 박광규 련장이 희생되였다. 허성숙은 큰 비통에 잠겼다. 그 무렵 허성숙의 신체상황은 더욱 악화되였다. 지도부에서 그더러 취사반에서 사업하도록 배려했지만 그는 기존의 위치에서 사업할 것을 간절하게 요구했다. 그는 기관총반 반장으로 임명됐다.
1938년, 허성숙은 화전 목기하, 돈화 따푸차이허 전투에서 전투 전 정찰임무를 출중하게 완수했다. 1939년 4월, 안도 서북차전투에서는 용맹하게 대오의 앞장에 서서 적의 진지에 돌진해 많은 적들을 사살했으며 기관총 한자루를 로획했다. 같은 해 8월, 제1로군 부사령 위증민이 제3방면군을 거느리고 돈화를 경유하여 안도현 대사하, 대장강(지금의 안도현 영경향 통양촌) 일대에 전이해 활동했다. 대장강 남쪽의 남구리와 소사하에서 적들을 소멸하기 위해 지휘부에서는 한개 소부대를 파견해 대사하를 포위공격하고 안도현성(지금의 송강진) 및 명월구 방면의 적들이 증원을 하도록 유인했다. 허성숙은 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적진의 측면으로 달려가 나무사이에 몸을 숨기고 적들을 향해 총을 쏘는 것으로 놈들의 전진을 막았다. 총소리를 들은 적들은 즉시 자동차에서 내려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허성숙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적들은 그가 자위단 단장 허기형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허성숙을 귀순시키려고 들었다. 적들이 리익을 내세워 회유하고 협박과 혹형 등 온갖 수단을 불사했지만 녀영웅의 견강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고 당에 대한 공산당원의 충성심과 공산주의 신념을 동요시키지 못했다. 적들은 결국 허성숙을 사형에 처했다. 허성숙은 겨우 24살의 나이로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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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범(1911-1940)


북경에서 출생했다. 1928년 6월, 북경향산자유원에서 연변에 왔다. 화룡현 개산툰소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으면서 비밀리에 혁명투쟁을 전개했다. 1930년, 연변지역 ‘붉은 5월 투쟁’에 참가하고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선후로 중공화룡현위 서기, 중공동만특위 비서장,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단 정치위원,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3사 정치위원, 동북항일련군 제1군 제2사 사장,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1방면군 지휘 등 직무를 력임했다. 그는 용맹하고 기지가 넘치며 뛰여난 군사전략으로 여러차례 일본괴뢰군에게 심한 타격을 안겼다. 1940년 4월 8일, 몽강현(지금의 정우현)에서 희생됐다. 2014년, 민정부에서 공포한 제1패 300명의 저명한 항일영렬 및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됐다.
 

조아범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여나 아주 어릴 때 북경향산자유원으로 보내졌다. 1924년, 중국공산당은 향산자유원에 지하조직을 건립, 조아범은 소년시절부터 맑스주의 계몽교육을 받고 투쟁단련을 거쳐 당의 신임을 받는 혁명청년으로 성장했다.
1928년, 조아범은 중국공산당의 파견으로 화룡현 개산툰 천평양정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됐다. 1930년 5월, ‘붉은 5월 투쟁’에 참가했다. 1931년,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같은 해 여름, 중공동만특위에 파견되여 사업했다. 이 기간 그는 여러차례 중공동만특위를 대표해 연길, 왕청 등 지역에서 순시사업을 했으며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에 참가, 령도했다. 1933년 여름, 조아범은 중공화룡현위 위원으로 임명, 같은 해 11월, 중공화룡현위 서기로 임명됐다. 1935년 3월, 조아범은 동만당, 단위 련석확대회의에서 특위 비서장으로 선거됐다.
1935년 5월, 조아범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단 정치위원을 맡았다.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되였으며 조아범은 제2군 제3사 정치위원을 담임했다. 8월, ‘하리회의(河里会议)’정신 및 군부의 배치에 따라 제3사는 무송현을 공격했으며 이어 부대를 이끌고 장백현 경내로 진입하여 일련의 전투를 치렀다. 1937년초, 조아범은 제1군 제2사 사장으로 전임됐다. 6월, 그는 부대를 이끌고 제4사(원 2군 1사)와 제6사(원 2군 3사)의 주력부대와 배합하여 장백현 13도구의 간산봉에서 일본군에게 심한 타격을 입혔다. 이후 그는 제2사를 이끌고 무송현, 몽강현(지금의 정우현), 림강현, 장백현 등 광활한 지대에서 전투를 펼쳤다.
1938년 1월 30일 섣달 그믐날 밤, 조아범은 부대를 지휘하여 맹가구의 ‘집단부락’을 불의 습격했다. 조아범의 부대는 일정한 량의 식량과 복장을 로획하고 신속하게 철수했다. 하지만 부대가 회두구(回头沟) 부근까지 전이했을 때 돌연 400여명이 되는 적들의 매복공격을 받게 됐다. 조아범은 즉시 부대를 명령하여 맞서 싸웠다. 5월부터 7월까지 집안(辑安, 오늘의 集安) 로령산 구역에서 선후로 두차례의 항일련군 제1로군 지도간부회의가 열렸는데 회의에서 조아범은 항일련군 제1로군 제1방면군 지휘로 임명됐다.
1939년 5월말, 조아범은 부대를 이끌고 금천으로 북상해 회두구에서 양정우가 이끄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부와 합류했다. 7월, 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조아범은 제1방면군을 이끌고 집안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가을, 일본군은 7만 5000여명을 남만에 집결해 항일련군에 대해 미친 듯한 ‘토벌’을 진행했다. 그 무렵 조아범은 엄중한 페질환을 앓고 있었지만 놀라운 의지력으로 제1방면군을 이끌고 집안, 무송 등 지역에서 악전고투했다. 1939년 6월부터 12월까지 항일련군 제1로군 제1방면군은 적과 총 23차례 교전했다.
1940년, 조아범은 기타 항일부대와 련합하여 림강, 몽강, 휘남, 류하, 무송 등 지역에서 싸웠다. 4월 8일, 조아범은 몽강현 룡천진 서옹권에서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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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장(1913-1940)


만족, 돈화현 서반절하툰(지금의 돈화시 한장향 한장촌)에서 출생했다. 1932년 9월, 붓을 던지고 종군해 왕덕림이 령도하는 길림중국국민구국군에 가입해 전방사령부 비서를 맡고 10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4년 6월, 녕안로농의용대 정치지도원을 담임하고 1935년 2월부터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 제1사 정치부 주임, 제2사 참모장,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2사 참모장, 사장대리, 중공도남특위 상무위원, 중공남만성위 위원,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5사 사장, 제3방면군 지휘 등을 력임했다. 그는 선후로 경박호 수력발전소 기습전투, 대사하전투, 한총령 매복전, 액목 지략전, 갈대못을 불태우는 등 일련의 저명한 전투들을 지휘하였으며 이로써 일본침략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안겼다. 1940년 12월 8일, 진한장은 녕안현 소만만구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됐다. 2014년 민정부에서 공포한 제1패 300명의 저명한 항일영렬 및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됐다.
 

1913년,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진한장은 9세에 사숙에서 글공부를 시작했다. 1924년, 진한장은 돈화현성의 사립 선화소학교에 전학, 성적은 언제나 앞자리를 차지했다. 1930년 12월, 진한장은 오동중학교를 수석졸업했다.
1931년 봄, 19살의 진한장은 문묘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다. 8월, 그는 현민중교육관에 전근하여 강연원으로 일했다. 1931년 9월 23일, 일본군이 돈화성을 점령하자 진한장은 이에 몹시 분개하면서 민중교육관에서 매주 진행하는 강연회를 통해 군중들에게 일본제국주의 죄행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1932년 2월, 길림중국국민구국군이 설립됐다. 진한장은 결연한 의지로 붓을 던지고 혁명무장대오에 투신했다. 녕안전투 이후 진한장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구국군 총부 기층당조직 책임자로 임명되여 주보중의 유력한 조수가 되였다.
1934년초, 진한장은 동북국민구국군 총사령부 특파대표의 신분으로 관내에 가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확대하는 활동을 진행했다. 1935년, 그는 동북항일련군 제5군 제2사 참모장 겸 당위서기로 임명되여 부대를 이끌고 장광채령과 로야령 사이의 광활한 지역에서 유격전쟁을 활발히 펼쳐 적들에게 심중한 타격을 안겼다. 1937년, 전국적으로 항일전쟁이 폭발했다. 동북항일련군은 관내 항일전쟁을 배합해 유격전을 적극 벌였다. 진한장은 5사를 이끌고 새로운 유격구를 창건, 지력이 뛰여나고 재빠른 유격전술로 적들의 거점을 공격하고 군용차를 가로막았으며 철로와 교량을 파괴하고 비행장, 창고 등 적들의 군사요충지를 폭파시켰다. 1938년 7월, 진한장은 부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경박호 수력발전소의 일본 수비대를 습격, 파괴했다. 1939년 8월, 진한장은 제1로군 제3방면군 총지휘를 맡게 되였으며 9월 위증민, 후국충 등과 함께 부대를 이끌고 대사하를 공격해 승리를 취득했다. 세차례 전투를 통해 도합 500여명의 적을 사살했다. 9월, 진한장의 부대는 매복작전으로 일본군 마쓰시마가 인솔하는 ‘토벌’대를 차단, 공격했다. 격렬한 전투를 거친 결과 괴뢰군 270여명을 살상하고 자동차 11대를 불태웠으며 경중기관총 9자루와 기타 군용물자들을 대량 로획했다. 진한장은 교묘하고 융통성 있게 부대를 이끌어 9년 동안 수백차례에 달하는 전투를 치렀으며 일본군 몇천명을 소멸하고 항일전쟁의 기타 전장을 유력하게 지원했다.
1940년, 태평양전쟁 전야에 적들은 항일련군에 대해 더욱 잔혹한 토벌을 감행했다. 일부 비밀병영이 련속 파괴되고 양정우, 조아범이 장렬히 순국했다. 그 무렵 진한장의 허벅지총상은 채 아물지 못했으나 여전히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고 탄약까지 부족한 상황에서 소분대를 이끌고 전투를 견지했다. 12월 8일, 반역자의 밀고로 소분대는 경박호 남쪽의 소만만구 로밀영 밖에서 1000여명 일본괴뢰군에게 포위돼 일촉즉발의 생사전투를 앞두게 되였다. 진한장은 10여명의 전우들을 집결시켜 침착하게 전투를 지휘했다. 용사들도 한치의 두려움없이 일본괴뢰군과 두시간이 넘는 악전고투를 이어가면서 일본군의 돌격을 련속 네댓번 격퇴시켰다. 적들이 항복을 권했지만 진한장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끝까지 쓰러지지 않았으며 의연히 큰 소나무에 기댄 채 장엄한 조각상처럼 불굴의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다음기 계속)
박진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
작가:장홍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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