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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1-11-10 15:02:43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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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룡덕
(1906-1934)


조선족, 화룡현 용화향 광흥촌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나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3년 3월, 화룡현 유격대대 정치위원으로 임명, 1934년 3월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2퇀 정위로 임명됐다. 차룡덕은 수차례 부대를 거느리고 적들의 뒤를 노려 그들을 타격했다. 8월, 안도현 청구자 전투에서 총을 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차룡덕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적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친우의 도움으로 그는 10살 때 겨우 학당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3년 후 생활고로 인해 학업을 그만두었다. 생계를 위해 그는 선후로 한 중의의 통역사로 일하고 수공업 작업장에서 일했으며 지주집에서 돼지도 키웠다.
1930년, 중공연변특별지부가 전개한 ‘붉은5월투쟁’에서 차룡덕은 고령일대에서 10여명 진보청년들을 조직해 야간학교를 꾸리고 그 학교의 책임자로 되였다. 같은 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년 ‘9.18’사변 후, ‘추수투쟁’에서 차룡덕은 고령(高岭)의 빈곤농민들을 거느리고 친일분자들을 체포해 처단했으며 지주들이 소작료를 감소하고 채무를 페지할 것을 요구했다. 1932년 봄, 고령일대에 흉년이 들어 빈곤농민들이 기아에 허덕였다. 그는 중공동만특위의 호소에 따라 농민들을 거느리고 지주들의 량식을 탈취하는 ‘춘황투쟁’을 펼쳤다. 투쟁에서 그는 무기의 중요성을 느꼈다. 그는 중공동만특위의 령도하에 현지 농민군중들을 조직해 지주의 무장을 탈취하고 항일무장을 건립하는 투쟁에 적극 뛰여들어 화룡현 개산구 반일유격대 창시인중 한사람으로 되였다. 그해 12월, 중공화룡현위는 개산툰, 달라자, 평강과 삼도구 등 지역에서 활동하던 반일유격대를 어랑촌에 집중시켰다. 화룡현항일유격중대를 설립하고 차룡덕을 유격대 소대장으로 임명했다.
1933년 3월, 화룡현유격중대는 유격대대로 확대 편성됐고 차룡덕은 대대 정치위원으로 임명됐다. 력량을 보존하고 적들의 정면 ‘토벌’을 피하기 위해 유격대는 두갈래로 나누어 적의 후방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유격대는 남평, 처창즈 위자위단을 섬멸하는 전투를 진행하고 고령경찰분주재소를 습격했다. 유격대의 신출귀몰 기습작전과 빈번한 출격은 일본침략자들과 그 반동세력에 엄중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그해 5월, 그는 1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우복동지역에서 임무를 집행, 우복동 사중촌에서 숙영했다. 얼마 후, 삼도구에 주둔해있던 일본군 수비대 학강 대장이 100여명 일본괴뢰군을 이끌고 태평촌의 대지주 류의현의 위자위단과 함께 유격대가 있는 집을 포위했다. 적들의 미친 듯한 진공에 차룡덕은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용감히 반격했다. 그 전역에서 유격대는 학강 대장을 포함한 30여명 일본괴뢰군을 사살했는데 이는 반일유격대가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약한 아군이 강한 적군을 이긴 기록을 세웠다. 그해 10월 31일, 차룡덕과 대대장 김호철은 유격대원을 거느리고 삼도구 청관촌에서 전투했다. 유격대는 적들을 굴에서 유인한 뒤 매복해있다가 적들을 실은 군용차량을 공격했다. 30여명 적들이 전부 소멸됐다.
1934년 3월, 화룡현유격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2퇀으로 개편되고 차룡덕은 제2퇀 정치위원으로 임명됐다. 항일전쟁의 간고한 투쟁 속에서 그는 2퇀을 거느리고 수차례 적의 후방에 심입해 습격했다. 그가 거느리는 2퇀은 안도 중부지역에서 전투하는 과정에 대전자, 처창즈, 십기가, 대사하, 대장강 등 지역의 적들을 습격했다. 그해 8월, 차룡덕은 부대를 이끌고 안도현 청구자에서 위자위단을 습격, 격전중 복부에 총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13
김순덕
(1911-1934)


조선족, 길림성 연길현 해란구 화련리 계림촌의 한 빈농가정에서 출생했으며 1931년 여름, 연길현 마반산기슭 화련리 농민적위대 대장을 맡았다. 1932년 ‘춘황투쟁’ 진행 당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7월, 화련리반일유격대를 설립, 무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심산골에 병기공장을 꾸리고 흙폭탄, 창과 칼 등 무기를 제조했다. 1933년 11월, 연길현유격대대 대장으로 되고 1934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 퇀장으로 임명되였다. 그해 6월, 길청령 포루를 습격하는 전투에서 총을 맞고 장렬히 전사, ‘길청령의 영웅’으로 불리웠다. 2020년, 김순덕은  퇴역군인사무부에서 공포한 제3패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되였다.
김순덕은 소학교를 졸업한 후 생활난으로 학업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 혁명자 김철진이 계림촌에서 혁명활동을 펼치면서 빈곤으로 공부를 그만둔 청년들을 위해 야외자습소조를 설립했다. 김순덕은 이곳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혁명사상 교양을 받았으며 혁명의 도리를 깨닫게 되였다.
1930년, 당조직은 계림촌에 호제회, 반제동맹과 농민협회 등 군중조직을 설립하고 군중을 발동해 항일투쟁을 전개하도록 했다. 김순덕은 활동에 적극 참가, 소선대 중대장으로 되고 얼마 후, 반제동맹의 책임자로 되였다. 1931년 가을부터 1932년 봄까지 김순덕은 군중들과 함께 중공동만특위가 발동한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에 참가했다. 그는 군중을 이끌고 선후로 화첨자, 벽수툰, 광제촌과 소영자 등 지역의 친일분자와 대지주의 량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한 군중을 거느리고 창, 검 등 무기를 만들고 계림촌적위대를 결성해 적위대대장을 맡았다. 투쟁 과정에 김순덕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무기가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32년 5월에 김순덕은 철기공장을 설립하고 비밀리에 긴 창, 장검 등 무기를 제조해 적위대를 무장했다. 반동세력을 짓부시기 위해 그는 적위대를 거느리고 계림촌 촌장 김동후의 측근인 류문세, 화련리 툰장 김성기, 하동툰 친일분자 허팔 등을 붙잡아 길거리를 회시했다. 이는 반동분자의 위풍을 대대적으로 꺾어놓았다. 그해 7월, 중공해란구위는 적위대를 토대로 화련리반일유격대를 설립하고 김순덕을 유격대 당지부 서기로 임명했다. 그는 유격대원들을 이끌고 친일지주를 습격하고 무기를 빼앗았으며 위경찰초소의 총을 지략적으로 탈취했다. 화련리유격대도 그의 령도하에 점차 발전해 그해말 30여명으로 되였다.
1933년 1월, 중공동만특위 지시에 따라 김순덕은 화련리유격대를 거느리고 왕우구에서 연길현 기타 몇갈래 유격대와 함께 연길현유격대대로 개편했으며 산하에 3개 중대를 설립했다. 김순덕이 제1중대 대장으로 되였다. 3월, 그는 유격대원들을 거느리고 농민으로 위장해 연집강자에 진입, 위자위단부를 기습하고 20여자루 총을 탈취했으며 위자위단 단장을 처단했다. 그는 또 유격대대를 따라 팔도구 부근에서 활동, 선후하여 로투구진, 팔도구진 지역에서 적들을 타격해 많은 전적을 거두었다. 중공연길현위 령도와 근거지 군중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김순덕은 유격대원을 거느리고 2개월 사이에 적들과 20여차례 전역을 진행, 150여명 적군을 살상하고 적들의 무기를 빼앗음으로써 반‘토벌’ 승리를 거두었다.
1934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설립되고 연길현유격대대는 독립사 제1퇀으로 개편됐으며 김순덕이 퇀장으로 되였다. 얼마 후, 그들은 길청령에 위치한 적들의 거점을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길청령은 연길에서 왕청현으로 향하는 요로이다. 적들의 교통선을 파괴하기 위해 그와 참모장 류란환은 15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길청령 포루를 공격했다. 김순덕은 몇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밤을 타 적들의 포루 부근에 잠복해있다가 2명 전사들을 파견해 포루를 폭파시키게 했다. 그러나 폭파수가 적들의 보초병한테 발각되였다. 위기일발의 순간, 그는 전투소조를 거느리고 사격을 시작했고 적들의 화력을 유인했다. 폭파수는 이 틈을 타 폭파약을 적들의 포루 옆에 놓았다. ‘쾅!’ 하는 폭발소리와 함께 적들의 포루가 폭파되였다. 이때 김순덕은 앞장서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이 전역에서 김순덕은 총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14
김훈
(1904-1934)


조선족, 왕극규라고도 함. 길림성 연길현 명동촌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했다. 1930년 7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중공왕청현위 제1임 서기를 력임했다. 1931년, 김훈은 적들에게 체포돼 연길감옥에 수감됐다. 옥중에서 그는 비밀리에 감옥당지부를 설립하고 여러차례 탈옥투쟁을 전개, 1934년 12월 16일, 옥중에서 적들에게 살해됐다.
1909년, 김훈은 큰아버지를 따라 연길현 의란구로 이주했다. 1920년, 그는 의란구에서 소학교 공부를 마친 후 룡정대성중학에 입학했다. 그 기간 그는 혁명사상의 영향을 받아 점차 성장했다. 김훈은 적극적인 반일활동으로 일본괴뢰 특무의 감시와 추적을 받았고 부득이 영신중학으로 전학해 공부하게 됐다.
1925년, 김훈은 부모를 따라 쏘련의 울라지보스또크의 삼촌집에 가게 되였고 그곳에서 대학에 입학했다. 쏘련에서 그는 공산주의사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많은 맑스-레닌주의 리론지식을 알게 되였다. 1927년, 귀국한 그는 2월에 가족과 함께 위왕청현정부 소재지인 배초구에서 거주하면서 향공소(乡公所)의 문서로 일하게 됐다. 이 기간 그는 계속해 혁명활동에 종사하고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김훈은 ‘10월혁명’을 선전하고 맑스-레닌주의와 반일사상을 널리 전파했다.
1930년 5월, 중공연변특별지부의 령도하에 동만 각 지역에서 ‘붉은5월투쟁’을 펼쳤다. 김훈은 중국공산당의 호소에 적극 호응하면서 배초구, 달라자 등 지역에서 선전사업을 펼치고 군중들을 발동해 투쟁에 참가했다. 그는 군중들을 조직해 지주의 집에 쳐들어가 친일분자와 토호렬신의 죄행을 폭로하고 반일 시위행진을 진행했다. 얼마 후, 중공연변특별지부는 공산국제의 ‘한 나라 한개 당’의 원칙에 따라 김훈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그는 대황구일대에서 혁명사업을 개척하고 당원을 발전시키며 농민협회 등 혁명군중조직을 건립했다. 얼마 후, 그는 천교령일대에서 로농유격대를 건립하고 대장을 맡았다. 유격대는 건립된 후 늘 불의에 적들을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1930년 10월, 중공동만특위 지시에 따라 룡반구(지금의 동신향)에서 중공왕청현 제1차 당원대표대회가 소집, 중공왕청현위를 건립하고 김훈을 현당위 서기로 임명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유격대를 거느리고 적들을 공격해 무기를 빼앗고 유격대 력량을 확충했으며 다른 한면으로는 각 지역을 다니면서 당원을 발전시켰다. 목단천에서 그는 조하규 등 6명을 당원으로 발전시키고 중공목단천당지부를 설립했다.
1931년 1월, 김훈은 묘령, 대흥구, 천교령 등 지역에서 사업을 펼쳤다. 1월 21일, 그는 천교령에서 불행하게도 적들에게 체포돼 수감됐다. 배초구의 위경찰서에서 적들은 그를 혹독하게 고문하면서 공산당 활동 행적을 알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비밀도 알아내지 못한 적들은 그를 위길림성제4감옥(연길감옥)으로 보냈다. 수감 후 김훈은 계속해 옥중 동지들과 함께 투쟁을 벌렸다. 옥중에서 림시당조직을 건립, 조직위원, 선전위원, 군사부장과 감찰위원을 설치하고 김훈이 서기를 맡았다. 당지부를 설립한 후 그는 탈옥준비 사업을 펼치면서 탈옥투쟁지휘부를 설립했다. 탈옥준비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때 반역자의 고발로 탈옥계획이 무산됐다. 첫번째 탈옥계획이 무산된 후 김훈은 기타 지도자들과 함께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두번째 탈옥계획을 제정, 계속해 탈옥을 조직했다. 1932년 여름, 그들이 두번째로 탈옥을 준비할 때 대외련락을 맡은 박춘식이 관건적인 시기에 두려워 물러나는 바람에 또 실패했다. 1934년 여름, 김훈은 동지들과 함께 단식투쟁을 진행하고 옥중 동지들의 생활조건을 개선할 것을 요구했다. 단식투쟁이 3일까지 지속되자 감옥측은 김훈 등 동지들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단식투쟁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김훈의 굳센 지조와 기개에 적들은 분해서 펄펄 뛰였다. 1934년 12월 16일, 적들은 김훈과 기타 몇명 단식투쟁의 주요지도자들을 비밀리에 살해했다.    


(다음기 계속)
장설화 편역
작가: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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