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곧 삶의 전부였다…

국가 1급 성악가 방초선의 인생하모니
날짜 2020-04-15 15:12:22 조회


중국조선족이 배출한 성악가로 널리 알려진 방초선(88세)은 〈처녀의 노래〉, 〈사과배 따는 처녀〉, 〈베짜기 노래〉 등 명곡을 불러 이름을 떨쳤다.
방초선은 중국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예술단체, 정치분야 등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해왔던 국가 1급 성악가이다. 국무원에서 수여하는 ‘정부특수공헌수당금’을 향수하는 방초선은《중국예술가사전》과 《중외녀성명인사전》 등 사전에 략력이 수록될 만큼 평론가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길림성 연변에서 북경으로, 또다시 전국, 세계로… 그녀의 목소리는 70년 넘게 아름다운 파장을 그리며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지난해 11월, 기자는 음악이 곧 인생이였고 음악이 전부였다는 조선족 저명 녀고음가수 방초선의 음악이야기를 가까이에서 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1932년 4월에 태여난 방초선은  여유롭지 못한 살림이였지만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화목한 가정에서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조선족 전통노래를 배워주었고 일본에서 류학을 하고 돌아왔던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외국명곡들을 배워주었다. “아버지는 일찍 유격대에 참가하면서 진보적인 사상을 접촉했고 집에 올 때마다 저에게 <단결가>, <홍기가>를 배워주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고 또 곧잘 불렀지요.”
벼모내기가 한창이였던 1947년의 봄날, 중국인민해방군 길동군분구 장병들이 그녀가 살던 왕청 류수하마을에 내려왔다. 장병들은 낮이면 농사일, 로동을 함께 도왔고 저녁이면 군민이 함께 모인 친목모임을 가졌다. 장병들의 요청으로 촌에서 누가 대표로 나와 노래 한곡 하라는 요청에 마을 촌장은 “초선아, 네가 나가서 한곡 해보아라!”고 방초선을 불러냈다. 평소 불렀던 <탄식소야곡>과 <런던단조>가 힘차게 어린 소녀의 목소리를 통해 불려졌고 부대 관계자는 곧바로 이 소녀에게 부대문공단원으로 참군할 것을 제의하였다. 흔쾌히 참군제의를 받아들인 방초선은 부모님 곁을 떠나 길동군분구 문공단의 꼬마선전원으로 되였다. 15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독창, 연극, 무용… 못하는 것 없이 혁명투쟁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나갔다. 포탄이 하늘에서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 전장에서 군영이 무대였고 참호가 무대였다. 이 참호, 저 참호 옮겨다니며 하루에 50수씩 되는 노래를 했다. 짬짬이 휴식을 틈 타 전우들의 갈라진 옷을 바느질하는 것도 단원들의 몫이였다. 참혹한 전장에서 집생각을 잠시나마 잊게 하고 사기를 돋구는 일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1948년, 료심전역에서 방초선이 속한 부대는 장춘을 해방하는 임무에 나섰다. 전방에서 전우들과 함께 적군의 진지를 향해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을 부르면서 전투사기를 올리고 적군을 와해시켰다. ‘무엇을 위해 노래하는가? 누구를 향해 노래하는가…’는 이 물음들을 이때부터 진지하게 생각했다. 백기를 들고 투항해 건너오는 적군을 보면서 그녀는 문예선전의 작용과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고 선전대원이 된 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가슴에 새겼다. 방초선의 노래소리는 총소리, 폭격소리가 무섭게 진감하는 전장에서 당찬 자신을 만들어주는 위로였고 대중들을 각성시키고 군대장병들의 사기를 복돋아주는 힘이였다. 방초선은 단원들과 손잡고 가렬처절한 전투환경 속에서 중국공산당의 문예 로선, 방침, 정책에 립각해 창작, 공연 활동과 선전, 고동 사업을 벌렸다.
새 중국이 창건된 1949년, 방초선은 연변가무단의 전신인 연변문공단에 배치되여 독창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듬해 열린 새 중국 창건 1주년 기념 문예야회에서 방초선은 모택동 주석을 비롯한 중앙의 지도자들을 모시고 평생 잊지 못할 무대에서 조선족가요 <베짜기 노래>를 불렀다. 당시 느꼈던 영광과 감동은 단지 그녀 개인의 자부심이 아닌 자랑찬 연변인민으로서의 무한한 긍지였다고 한다.

공화국 창건 전에 혁명문예사업에 공헌해온 방초선, 1950년대는 그녀의 예술생애가 풍부해지고 다채로워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연변가무단에서 독창가수로 활약하면서 노래 뿐만 아니라 무용, 연극 등 분야에까지 활약을 펼치면서 유망주로 떠올랐다.
그러던 1957년, 방초선은 문화부의 선발을 받고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6회 세계청년련환축제 음악콩클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다. “축음기가 선생님이였습니다.”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흉내 내고 따라 부르면서 련습했다. 110개 나라의 수백명 참가자들이 출전한 음악콩클에 참가해 최정연 작사, 정진옥 작곡한 <처녀의 노래>를 흥겹게 불렀다. 처음 참가하는 국제대회라 준비도 충분히 하지 못하고 다급히 무대에 올랐지만 예상외로 수백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당히 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받아안으며 모든 참가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성악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정황하에서 국제적인 문예무대의 영광을 받아안은 그녀는 나라를 위해 명예를 빛냈다는 사실에 더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1962년에는 주은래 총리를 만나는 기회도 있었다. 당시 연변가무단의 배려로 중앙음악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마침 졸업을 앞둔 시기였다. 북경호텔에서 녀성표현창 <처녀의 노래>를 관람한 주은래 총리는 방초선이 노래와 춤에 뛰여나니 동방가무단에 전근하면 더 큰 발전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친히 추천해주었지만 연변가무단의 상황을 알고 나서 연변의 결정을 존중해주었다.
그녀의 음악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인물을 말하면 인생파트너인 남편 왕개평이였다. 1959년 중앙음악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만나 서로에게 이끌린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서로의 음악을 채워주고 있다. 1975년에 방초선은 남편을 따라 중앙방송예술단에 전근되여 독창가수와 성악교원으로 활동분야를 넓혀갔다. 1980년부터 2003년 사이 두 사람은 전국 각지는 물론 미국, 카나다, 일본, 한국 등 해외에서 나란히 부부음악회를 가지면서 80여차례에 달하는 순회공연도 펼쳤다. 유럽과 아세아 땅에서 우리 나라를 알리고 조선족가요를 알린 그녀는 수많은 무대에 올랐지만 지금의 그녀를 있게 만든, 음악인생의 원점이 시작된 곳, 연변이 가장 고맙다고 한다.

은퇴 후의 삶도 방초선은 소수민족 성악발전을 위해 자신의 힘을 아끼지 않았다. 제8기, 제9기 전국정협 위원으로 활약하는 기간에도 문화부 소수민족문화예술기금회 설립에 적극 참여했고 소수민족성악발전을 위한 연구회와 좌담회를 조직해 어떻게 민족의 창법과 결부시켜 대중들의 환영을 받는 성악가로 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토의했다.
인터뷰 도중마다 짧은 노래로 인생이야기를 대신해주는 방초선 선생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강렬한 힘과 박력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전선에서의 고동소리로 시작해 무대 우에서 빛을 내는 그녀의 근 70년을 돌이켜보면 음악과 함께 해온 예술인생, 우리의 요소를 담은 멜로디는 ‘불후의 명곡’으로 탄생했다.  
작가:정영철 김철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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