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9-10-30 13:34:23

7월초의 어느 날,  화룡 어느 농촌을 다녀왔다.
‘지식청년, 상산하향’ 반세기를 넘어 작정하고 찾아 떠난 시골행이였다. 필자로 말하면 피페와 가난의 때를 벗은 정든 두번째 고향의 눈부신 변화가 잔뜩 기대되는 추억의 나들이였고 동행한 아들애와 며느리애에게는 지나간 세월 부모세대의 하향지식청년 삶을 수박 겉 핥기 식으로나마 한번 체감해보는 수학려행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필자 앞에 펼쳐져있는 시골마을은 어지간히 피페한 게 아니였다. 상산하향 30년이 되던 1998년에 찾았던 때는 그런대로 마을에 사람들 냄새가 짙었는데 지금은 어쩐지 사람 사는 동네 같지 않게 기괴하였다. 해외로무의 ‘쓰나미’가 훑고 지나간 참상이 력력하다. 쓰러지기 직전의 페가는 그대로 방치되여있고 사람의 발길이 별로 닿은 것 같지 않은 마을도로 옆은 잡초로 무성하다.
어찌 보면 50년 전 동란년대의 삭막했던 흔적과 30년 전 호도거리 세월에 미처 풀지 못했던 ‘성장의 고민’이 반죽되여 도시화, 해외로무화 바람으로 뚫린 농촌 ‘공동(空洞)화’ 속에 그대로 로출되여있는 것 같아 필자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요행 인적이 느껴지는 동네어귀에 가보니 피페한 마을과는 전혀 맞먹지 않게 화려한 철제울타리 안에 네모반듯한 문구장이 닦아져있는데 남녀 중장년 5, 6명이 문구게임에 몰입하고 있었다. 이 동네 토배기들은 아닌 듯한 낯선 얼굴들이였다. 다른 동네에서 이사해온 농호들이라고 한다. 그들과 잠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필자는 그냥 답답한 심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마을이 왜 피페한지를 알 것 같았다.
100여세대에 달하는 이 마을에 지금 실제 남아있는 세대는 여덟호밖에 안된단다. 모두 해외로, 국내 대도시로 빠져나간 것이다. 해외바람과 도시화 바람은 이곳도 비껴가지 않았다.
동네에는 가게도 있는 것 같지가 않아 일상 생필품은 어떻게 해결하느냐 물으니 20여리 밖의 투도진에 가서 구입해온단다. 여덟 세대를 위해 가게를 내는 건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계산 때문인 것 같다. 여덟 세대를 위한 진료소도 있을 리 없었다.
가장 관심사로 되는 밭은 어떻게 다루느냐고 문의했더니 전부 이 마을 근처의 타민족 농민들에게 양도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밭은 양도한 것이니 다시 찾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밭을 양도하지 않고 우리가 다룰 수는 없느냐는 물음에 힘들어 못한다며 뽈을 겨냥하여 문구채를 잽싸게 놀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그러니 그들은 정부에서 나오는 생활구제금과 타민족들이 건네주는 토지양도비, 그 밖에 자식들이 타향에서 벌어 보내오는 생활비에 목을 매고 별 근심 없이 매일 문구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빈 껍데기만 남은 이 마을을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주 안의 여러 조선족농촌을 돌아보면서 한국로무송출과 도시화 바람으로 생긴 ‘공동’화 현상을 통감해왔지만 그래도 각급 당정의 ‘반포(反哺)’리념에 힘입어 생기를 되찾는 풍경을 도처에서 느낄 수 있어 그런대로 고향재건의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에 가슴 부풀었던 필자였다. 그런데 그 희망을 이곳 화룡 평강벌의 한 시골에서는 느낄 수 없어 너무나 속상하다. 이런 시골이 어찌 이 한곳 뿐이랴?
아들애와 며느리애도 망연자실한 표정이였다. 더 있어 봤대야 문구게임에 열이 올라있는 그들에게는 시끄러운 불청객정도밖에 되지 못하리라 생각되여 자리를 떠났다.
마을을 벗어나 큰길에 막 들어서는데 시골풍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길 량켠에 각종 승용차와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주차해있었다. 사고라도 났나 하고 살펴보니 그게 아니였다. 큰길 바로 옆 넓은 논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제초작업에 한창인데 떠드는 소리를 들어보니 타민족들이였다. 조선족동네의 논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타민족들, 답은 그 자리에서 류추해낼 수 있었다.
조선족농민들한테서 양도받은 옥토를 타민족농민들이 도회지의 친인척, 친구들을 불러들여 다루고 있다고 길가에 주차된 승용차와 오토바이들이 귀띔해주고 있는 것이다.
귀가 내내 머리속은 그냥 온 가족 친인척까지 동원하여 양도받은 논밭에서 구슬땀 흘리는 타민족 농민들, 힘들다며 밭을 타민족에게 넘기고 문구치기에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조선족농민들의 대조적인 모습이 클로즈업되여 교차되면서 필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 같은 풍경이 화룡의 치벽한 산골이 아니라 습근평 총서기가 다녀간 광동촌과는 불과 수십리 거리에 있는 평강벌에서 벌어져있는 것이다. 주급 지도자를 수없이 배출한 업적과는 무관하게 피페한 모습을 려과없이 펼쳐보인 화룡의 어느 시골 궁상에서 필자는 도시의 반포가 이곳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한눈으로 보아낼 수 있어 마음이 무거웠다.

농촌개혁이 궁극적으로는 농민들의 인식전환이라는 관건고리를 풀어야만 가능하다는 도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안휘성 소강촌 18명 농민의 목숨 건 혈인이 우리 나라 농촌개혁의 서막을 열었지만 그 뒤 20여년의 침체기를 깨고 원기를 되찾을 수 있은 것은 안휘성 제2패 파견간부를 선두주자로 한 기관간부들에 의한 사상해방이 불러온 ‘두번째 창업’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 창업모드가 소강촌 농민들의 인식전환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연변의 경우 몇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귀향창업 만인계획’, ‘우수대졸생 천인계획’ 프로젝트는 자치주 당정이 내놓은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연변 새농촌건설이 큰 탄력을 입고 있으며 따라서 해외로무로 빚어진 농촌 ‘공동화’ 현상도 메꾸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빈곤퇴치 난관공략’ 또한 기관간부를 시골로 파견하여 촌당지부 서기를 맡게 한다거나 당정기관 각 부서가 빈곤촌 하나씩을 떠맡는 것 같은 실질적인 대책이 마련되여있어 연변농촌이 환골탈태의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필자는 최근에 외래손님을 모시고 훈춘 경신진의 방천촌, 룡정 지신향의 명동촌, 화룡 동성진의 광동촌을 비롯하여 주 안의 몇몇 농촌을 돌아본 적이 있다. 한마디로 그제날의 초췌한 시골이 아니라 광택이 흐르는 현대판 민속촌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동방 제1촌’ 방천, ‘조선족교육문화부호’ 명동, ‘총서기가 찾아준’ 광동 같은 유명한 촌은 제외하고도 빈곤에서 허덕이던 많은 농촌이 몰라보게 변하고 있었다.
그 비결은 단 하나, 도시의 ‘반포’ 전략에 따른 내생동력으로 이끌어낸 농민들의 긍정적인 인식전환에 있었다. 이름난 빈곤촌들을 유족한 마을로 화려한 변신을 할 수 있도록 한 선두에는 ‘귀향창업 만인계획’, ‘우수대졸생 천인계획’, ‘빈곤퇴치 난관 공략’ 사명을 짊어진 도시기관간부와 귀향창업자, 우수대졸생 ‘제1서기’들이 포진돼있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 수 있었다. ‘반포’ 전략권에 들어간 빈곤촌들은 줄줄이 피페했던 어제와 결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주소이다.
일전에《연변일보》에서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우리 주가 루계로 전자상거래 빈곤층부축 도급촌이 448개, 농부산물 인터넷수입이 2억 1,900만원에 달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도시 ‘반포’로 일궈낸 변화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래서 화룡 어느 시골의 그 피페함과 무기력함에서 도시 ‘반포’의 따사로움이 루락됐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리유이다.
요즘 소집된 주당위 농촌사업회의는 전 주의 농업농촌중점 사업이 ‘정밀화 빈곤해탈 난관공략’에 초점을 둘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형식주의가 아닌 실사구시 사업 태도로 일궈낸 확실한 변화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찾은 피페한 농촌마을에도 ‘정밀화 빈곤해탈 난관공략’에 초점을 맞춘 ‘반포’ 해살이 비춰져 기관간부가 파견해 들어가고 유능한 귀향창업자들의 정착이 현실화된다면 모든 상황은 일조일석에 변화의 양상을 맞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관광명소 룡문호와 광동촌 중간지대에 위치해있는 평강벌의 이 농촌이 반포와 등진 피페한 고장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그 어떤 리유도 없지 않는가?
뒤늦게나마 평강벌 자연생태에 걸맞은 멋진 반포 씨나리오에 의해 이 마을이 지금의 ‘여덟 세대’로부터 다시 ‘백여세대’를 아우르는 유족하고 살 만한 고장으로 부상되는 것은 먼 일이 아닐 것이다.
이번 시골행이 필자에게는 두번째 고향마을 재건을 주목할 수 있는 계기로, 아들, 며느리에게는 ‘농심’수혈의 소중한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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