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길오아시스꽃방 남철 사장의 귀향창업 스토리
날짜 2019-10-29 14:31:11

대부분의 남자에게 꽃은 엄마, 스승, 애인, 안해에게 드리는 선물 정도로 그친다. 그만큼 남자와 꽃은 어색하면서도 어울리는, 멀고도 가까운 사이이다. 그러나 오아시스꽃방 남철(41세) 사장에게 꽃은 청춘을 피워준, 가족을 만들어준, 남자의 진한 향기를 뿜어내게 해준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고중시절 학교의 추천으로 길림공업대학 기계과학및공정학원에 입학하게 된 남철은 대학에 입학해서도 꾸준한 노력과 파워있는 리더십으로 학생회 회장직을 맡게 되였으며 2학년 때에는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가입하게 되였다. 노력자는 행운아가 되기 마련이다. 그가 3학년 때 전국적으로 대학 합병열이 뜨거워지면서 길림대학, 베쮼의과대학외 그가 재학중이던 길림공업대학 등 다섯개 학교가 새로운 길림대학으로 합병되여 길림대학 졸업증을 안게 되는 기적 같은 일이 생기기도 했다.
첫 직장과의 운명의 만남
명문대학 졸업생이라는 타이틀 덕분일가. 취직을 앞두고 참가했던 첫 공개초빙회의에서 25개의 회사에 리력서를 제출했는데 글쎄 23개의 회사에서 러브콜을 걸어왔을 줄이야. 그러나 대부분이 세계 500강 기업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설레여야만 했을 수많은 러브콜에 어쩐지 썩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상승세를 타고 있는 회사의 회사원보다는 규모가 작더라도 발전공간이 더 큰 회사에 취직하고 싶었던 그였다.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하게 된 인생 첫 직장은 H-ONE(천진)포장인쇄유한회사였다.
대학교 4학년 때, 학교의 졸업생정보사이트를 보고 우연히 조선족리사장 한분이 련락해왔다. 아직 대학생 직원이 없는 회사에 그해부터 대학생들을 대량으로 영입하고 싶은데 그 1번으로 남철을 초빙하고 싶다는 것이였다. 장춘에 올 때마다 남철과 만남을 가지며 회사의 취지와 젊은이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였던 리사장은 남철에게 믿음과 호기심을 심어주었다. 회사에서는 남철에게 호구를 해결해주고 마케팅, 관리 쪽을 함께 배울 수 있는 리사장조리직으로 초빙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꽤 잘 나가는 거래처들을 두고 있는 알짜배기 인쇄회사에서 남철은 하나하나 업무를 다져가고 있었다.
한번은 우연히 인터넷에서 모 유제품회사의 박스생산업체 입찰공고를 보고 리사장께 입찰회의에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리사장은 남철을 처음으로 홀로 출장을 보내며 기대감보다는 좋은 경험을 쌓고 오길 바라는 마음뿐이였다. 그러나 그 출장길이 후날 H-ONE의 제일 큰 수입원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 유제품회사에서는 남철의 열정과 제안 특히는 인품에 크게 마음이 동하여 많은 경쟁업체들중에서 남철의 회사를 선택해주었던 것이다. 500개, 1,000개씩 주문을 시작하던 그 유제품회사에서 어느 한해에는 년간 3,000만개의 박스를 통채로 남철에게 주문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그 거래처의 결산이 밀릴 때에는 300여명 직원의 월급을 주는 것마저 골치거리가 될 만큼 회사 수입에 큰 영향을 미치는 대거래처가 되였던 것이다.

내 가족을 위한 그녀의 현신
그렇게 3년 반이 흘렀을 쯤, 남철의 인생에 운명의 녀인이 나타났다. 천진에서 일찍 의류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그녀를 통해 의류사업에 료해하게 된 그는 아쉬웠지만 새로운 도전을 위해 정든 첫 직장에서 사직한 후 그녀와 손잡고 의류사업에 뛰여들었다. 보석은 어디서나 빛나기 마련이다. 일찍 의류생산의 전체 라인을 꿰뚫고 있던 그녀를 통해 원단 구하기, 패턴 짜기, 부자재 갖추기는 물론 제작과 수출까지 하나하나 배워갔다. 그녀와의 환상의 호흡으로 그들은 1년간 복장 30여만장을 수출하면서 의류분야에서 점차 자리를 굳혔다. 그러는 동안 둘 사이에도 핑크빛 기운이 피여올라 행복 속에서 더 큰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던 2010년 8월, 청천벽력 같은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도저히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자식으로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지만 일단 아버지 곁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하던 모든 일을 팽개치고 녀자친구 박리화(40세)와 함께 귀향길에 올랐다.
아직 결혼을 하지도, 제대로 아버지께 소개해드린 적도 없었던 그녀였지만 남철의 곁에서 병든 아버지를 간호해주며 따뜻한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이듬해 봄향기도 맡아보지 못한 채 아쉬움의 눈을 감았다.

슬픔을 잊게 해준 꽃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한동안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남철의 나이 30세, 다시 천진으로 돌아갈가, 해외에 나가볼가, 무한 고민에 빠져있다가도 외로이 남게 된 어머니를 홀로 두고 다시 떠날 수는 없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무언가에 집중이라도 해야 슬픔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남철은 박리화를 데리고 당시 연길에서 꽃방을 운영하고 있던 사촌누나를 찾아갔다. 가게일도 돕고 짬짬이 꽃꽂이라도 배우며 우울함을 달래고 싶었던 것이다. 꽃방외에도 여러가지 사업을 하고 있었던 사촌누나는 가게를 비우기가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빠른 시일내에 꽃방의 많은 업무까지 익숙해져 ‘주인’의 역할을 도맡아하게 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슬픔도, 괴로움도 조금씩 옅어져갔다. 남철은 박리화를 안해로 맞았고 어느새 둘 사이에는 예쁜 아기도 태여났다. 안해가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는 사이 남철은 여전히 누나의 일손을 도우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남철의 머리속에서는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기초로 작게나마 자신만의 꽃방을 오픈하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쇄사업과 의류사업에서 마케팅 경험도 쌓았겠다, 남철은 용기를 내고 꽃방 창업을 준비했다.
쉬울 줄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3년 넘게 사촌누나의 가게에서 꽃을 다뤄왔으니 꽃방 운영쯤은 식은 죽 먹기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간판을 걸었다 해서 고객들이 저절로 찾아오지는 않았다. 꽃다발을 만드는 날보다 언제면 고객이 찾아올가 문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날들이 더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지인의 초대로 위챗그룹 ‘7080의 하루’에 가입하게 되였다. 위챗 ‘늦둥이’에게 위챗그룹은 더욱 생소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하게 ‘잠수’ 해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 우연히 그룹에서 조직한 모임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꽃방 사장이라고 누군가에게 소개를 할 기회를 얻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룹내 지인들이 꽃을 주문하기 시작했고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홍보를 해주어 주문량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다. 첫 직장에서 발로 뛰며 마케팅을 했던 순간들을, 안해와의 련애시절 복장을 수출까지 했던 순간들을… 나가서 뛰여야겠다. 고객을 찾고, 시장을 찾고, 나를 알리고, 가게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머리를 스쳐갔다.

타향에서의 경험, 귀향창업의 디딤돌로
부부 분담부터 다시 하기로 했다. 안해의 손에 꽃 제작을 통채로 맡기고 남철은 본격적으로 마케팅에 전념하며 ‘안’과 ‘밖’의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가기로 했다. 각종 행사에 적극 참가하며 우수한 CEO들의 경험을 전수받고 주변에 자신을 많이 알리며 연변사람들의 머리속에 ‘오아시스꽃방’이라는 이름을 각인시켜가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꽃방을 널리 홍보하고 내부적으로는 상품의 질과 량에 한치의 부족함을 용서치 않았다. 아침에 배달해달라는 단체예약을 받았을 경우도 여유롭게 전날부터 미리 만들어놓는 대신 반드시 배달일 꼭두새벽부터 ‘전쟁’해왔다. 손님에게 조금이나마 더 신선한 생화를 안겨드리기 위함이였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은 빛을 받았다. 미구하여 꽃방 오픈 이듬해 3.8절에는 300여개의 주문을 돌파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새로운 상품 출시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생화는 언젠가는 시들어버린다고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을 고려하여 꽃의 아름다움을 담은 ‘비누꽃’ 제품을 제작하였는가 하면 연변에서 거의 최초로 프리저브드플라워(永生花), 일명 ‘시들지 않는 생화’를 출시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까지도 시들지 않도록 생화를 특수처리하여 만드는 프리저브드플라워는 출시된 순간부터 새로운 신드롬을 일으키며 “시들어버리는 꽃은 왜 자꾸 사!” 하는 사람들에게 생화에 대한 편견을 깬 꽃으로 다가갔다.
“오아시스꽃방의 꽃은 특별히 정성이 느껴져요.”
“오아시스꽃방의 생화는 다른 꽃방의 생화보다 수명이 더 길어요.”
그 리유는 간단했다. 주문받기 전부터 미리 만들어놓았다가 고객에게 안기는 생화는 이미 신선함을 잃는 반면, 예정된 시간에 맞춰서 다듬는 생화는 고객에게 안기는 순간 더 오래동안 신선하게 향기를 뿜게 되는 것이다.

추운 날, 따뜻한 감동
어느 겨울날 저녁 9시 반쯤, 잊지 못할 전화 한통이 울려왔다.
“사장님, 래일이 와이프의 생일이라 장미꽃 99송이를 담은 꽃바구니를 선물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와이프랑 함께 식사하고 있는데 조금 후 저녁 12시를 거의 맞춰서 저희가 귀가하면 사장님께서 미리 저의 집 밑에 도착해있다가 저희가 집문에 들어서면 그때를 맞춰 꽃바구니를 배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꼭 부탁드립니다.”
남들은 이미 취침했을 시간이였다. 주문을 받고 다시 가게로 나간다고 해도 꽃다발 하나에 그다지 큰 돈벌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철은 전화도 채 끊기 전에 벌써 옷을 찾아 입고 있었다. 한명의 고객이 한송이의 꽃을 원할지라도 자신의 꽃방을 찾아준 고객이라면 반드시 최선의 서비스를 해줘야 한다는 것, 이러한 마음가짐에 대해 남철 사장은 단 한번도 흔들려본 적이 없었다.
다행히도 집과 가게는 10분 거리에 있었다. 한송이 한송이 다듬고 꽂고 디자인하고 겉포장까지 마치고 남철 부부는 고객의 집 아래에 몸을 숨겼다. 자가용이 없었던 시절이라 추위를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지만 부부는 자신들의 추위보다 생화가 얼기라도 할가봐 더 걱정되였다. 부부는 품속에 꽃바구니를 품고 한겨울 가장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꽃을 주문한 로맨틱 신사가 문을 열고 안해와 함께 집에 들어섰고 예상했던 대로, 아니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서프라이즈마냥 남편의 손에 바구니를 전달하고 돌아섰다. 문너머에서 들려오는 안해의 기쁨에 겨운 웃음소리는 그 부부에게도, 남철 부부에게도 그 겨울 최고의 감동으로 남았다.
언제 누가 누구를 위해 꽃을 주문할지 알 수 없어 제대로 려행 한번 꿈꾼 적 없다. 3.8절처럼 대표적으로 꽃 주문이 많은 시기에는 하루에 1시간도 겨우 눈을 붙인다고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꽃방을 찾아온 손님에게는 최고의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 꽃 주문의 량이나 액수를 떠나 한송이를 주문한 고객에게도 백송이를 주문한 고객과의 똑같은 서비스를 하겠다는 장인의 정신으로 남철은 하루하루를 꽃밭에서 숨 쉬고 있다.
“오래동안 떠나있었던 고향을 다시 돌아왔을 때는 오히려 이곳이 타향 같았습니다. 친구도, 인맥도 없이 외로웠던 곳에서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이 들었죠. 많이 잃을 줄 알았고, 정말 잃은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욱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남자로서 꽃을 들고 배달을 다니는 것이 부끄러웠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꽃을 들었을 때 가장 나다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향에 돌아와서 꽃을 만났기에 가정도 만들고 딸도 얻고 창업도 했네요.”
쑥스럽게 웃는 남철의 눈가에 지난 8년 동안 꽃꽂이를 배우고 꽃방을 오픈하기까지 분투해왔던 추억들이 필림처럼 스쳐지나간다.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버텨왔고 그 버팀의 시간들이 헛되지 않도록 하루하루를 더 노력하는 남철 사장이다.
“타의로 오든, 고향에서 반드시 꿈을 이루고저 오든, 귀향은 행복한 일인 것 같습니다. 저를 성장하게 했던 곳은 저를 배반하지 않을 겁니다. 고향에서 창업하는 다양한 분야의 우리 청년들이 힘을 합친다면 우리 연변의 경제발전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가요?”
더 큰 땅을 찾아 나가는 청춘들도 있지만, 귀향창업을 택한 남철 사장과 같은 청춘들이 있기에 우리 고향의 래일은 더욱 생기로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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