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남성 원보산지방위원회 서기 양선주를 기억하며
날짜 2020-01-10 16:07:17

양선주(1927-2010)
운남 보산(云南 保山)사람. 1952년 1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환경보호 걸출공헌자’의 칭호를 받았고 ‘전국우수공산당원’칭호를 추서받았다.

짚신 서기, 농민의 본색 간직
1965년의 어느 날, 밀짚모자를 쓰고 짚신을 신은 한 중년사나이가 시전현(施甸‘?)의 보장공급판매합작사(保쇖公社)에 와서 책임자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다. “지금 자리에 없습니다.” 접대를 하던 사무인원은 마침 현당위 서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책임자가 농민의 옷차림을 한 사나이를 만날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
중년사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현당위 서기를 만나지 못한 공사 간부들은 알고 보니 방금 전 공급판매합작사에 찾아온 농사군 옷차림을 한 중년사나이가 현당위 서기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골에 내려갈 때면 항상 호미를 손에 들고 밀짚모자를 쓰고 짚신을 신는 것을 좋아했다… 양선주는 1951년 사업에 참가해 운남성 시전현당위 서기, 보산(保山)지방당위 서기 등 직무를 거치면서도 늘 순박한 농민의 본색을 잃지 않아 사람들에게 ‘짚신 서기’로 불리웠다.
검은 얼굴에 굳은살이 박힌 두 손의 양선주는 마을에 내려가기를 즐겼는데 농민군중들과 함께 밭을 갈고 모종을 심으며 집집마다 다니며 농민들의 질고를 살폈다. “농민과 함께 지내면서 료해하고 느낀 것이 가장 진실된 것입니다.”고 양선주는 대중과 함께 일하는 것을 기층 료해를 위한 중요한 방식으로 삼았다.
1985년 창녕현(昌첦‘?) 진화향(金맆꽬)에서 심한 수해를 입었는데 당시 보산지방당위 서기였던 양선주는 즉각 회의를 열어 한창 건설중이였던 지방당위청사의 공사작업을 림시 중단하고 관련 자금을 구호자금으로 쓸 것을 제안했다. 일부 동지들이 의견도 있었지만 양선주는 “만일 인민군중이 고통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웅장하고 화려한 청사에 한가롭게 앉아있다면 부끄럽지 않겠냐?”고 되물었다.
모든 것은 군중을 위해 생각하고 군중을 위해 사업을 이끌어나갔다. 양선주는 이렇게 보산의 지도간부와 군중들을 이끌고 난국을 맞아 대담하게 일련의 개혁 실천을 탐색하고 척박했던 고향땅에 경제, 사회 발전의 씨앗을 뿌려 보산을 점차적으로 량식창고로 건설해 공업, 건축업 면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큰 산에 들어가 소박한 약속 실천
“산이 푸르지 않고 땅이 메마른 것은 가난을 키우는 뿌리이다.” 1988년 3월, 61세의 양선주는 보산지방당위 서기에서 퇴직한 뒤 곤명시에서 편안한 로년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대량산에 들어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나무를 심었다.
“대량산, 대량산, 반년은 비물, 반년은 서리…”
극도로 렬악한 환경에서 나무가지로 엮어 만들었던 오두막집은 반년도 안돼 바람에 날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양선주는 림업종업원들을 이끌고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고 한쪽으로는 집을 지었는데 7,000원을 들여 유모전집(油毛毡房) 40채를 지었다. 산에는 바람이 세고 비가 많이 오며 습기가 많았다. 양선주는 그렇게 지어진 유모전집에서 9년 남짓이 생활했다. 끼니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사무용 책상에 간소한 침대, 군중을 위한 길에서 정작 자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민둥산을 삼림으로 바꾸는 데는 많은 묘목이 필요했었지만 구매자금도 없이 과연 어디에서 그 많은 묘목을 구해왔을가?
오랜 시간을 거쳐 양선주는 림업종업원들과 함께 도구를  챙겨나와서 도처에서 묘목을 찾았다. 매년 열리는 단오절 맞이 화훼시장은 보산의 전통명절이다. 양선주는 시장거리에 나서서 나무 씨앗을 주으러 다녔다. 혼자서 줏기 힘들면 림업종업원들을 불러다 같이 줏군 했다.
비료가 없으면 모두들 마을에, 골목에 널린 소나 돼지 분변을 주어 밑거름으로 만들었다. 자금난에 어쩔 방법이 없을 때면 양선주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성, 시 관련 부문에 가서 항목을 따내기 위해 여러번씩 바삐 돌아쳤다.
작은 열매의 씨앗 하나가 세월의 륜회 속에서 점점 더 많은 가지와 무성한 잎을 가진 과수나무로 자라났다.
22년 동안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며 양선주는 간부, 군중들을 이끌어 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하여 5.6만무의 대량산에 푸른 옷을 입혀주었다. 그는 또 삼림지구에서 도로 18km, 송전선로 4km 넘게 만들어 대량산 린근에 거주하고 있는 군중들에게 전기가 통하는 생활을 선물했다.

선주림산작업소에 세워진 록색 공적탑
“고향땅과 당이 나를 키워주고 양성했소. 대량산이 말라버리고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될 거 같소? 숲을 만드는 일 한가지라도 제대로 해보려고 했소.”
양선주는 초심을 잃지 않고 일생을 한가지 일에 바쳤다.
2009년 4월, 양선주는 가치 3억원의 대량산림산작업소 경영 관리권을 무상으로 국가에 바쳤다. 그는 “이 재부는 처음부터 국가와 군중의 것이였고 저는 단지 그들이 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하는 것을 도왔을 뿐이였습니다. 이제 도저히 할 수 없을 거 같은데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2010년 7월, 양선주는 마지막으로 대광산에 올랐다. 중병에 시달리는 그는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겨우 몇걸음 내디딜 때마다 멈춰 서서 쉬여가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한그루 한그루 심은 나무를 바라보면서 로인은 환하게 웃었다. “이제 내가 자주 못 올 것 같으니 나무가 재목으로 쓰일 수 있게 될 때면 반드시 계약대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게.” 그는 림산작업소 책임자에게 간곡한 당부를 하였다.
2010년 10월 10일, 83세의 양선주는 세상을 떠나면서 오아시스를 남겼다. 대량산림산작업소는 로서기를 기억하면서 ‘대량산림산작업소’를 ‘선주림산작업소’로 명칭을 바꾸었다.
2014년 12월 ‘양선주간부학원’이 정식으로 설립되였다. 몇년이 흐른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원들이 양선주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 모였다.
한때는 민둥산이였던 대광산은 삼림으로 변해 나무가 울창하고 시내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대량산의 산림피복률도 1988년의 17% 미만에서 97.17%로 놀라울 정도로 제고되였다.
“아버지는 공산당원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시전현 당학교의 교사인 양선주의 둘째딸 양혜란은 양선주간부학원에서 학원들에게 양선주 가족의 가풍을 이야기해주곤 한다. 그는 “아버지의 정신은 소중한 자산”이라며 “우리는 그를 모델로 삼아 끊임없이 나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편역: 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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