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20-01-10 15:53:15

연변조선족자치주서류관에 소장돼있는《민성보》는 1928년 년초에 창간되였다.
《민성보》는 당시 화룡현교육국 국장 관준언과 연변의 여러 유명인사들이 공동으로 발기하여 창간했다. 이 신문은 당시 동북에서 유일하게 조, 한 두가지 언어로 출판발행됐고 주요하게 조선족과 한족 민중의 어려운 삶을 반영하고 연변에 대한 일제의 식민통치와 추악한 만행을 폭로했다.
90년 전, 관준언은 자신이 앞장서 꾸린 이 신문이 중국공산당이 연변에서 당조직을 건립하는 데 조건을 창조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이곳에 심은 불씨는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반제반봉건 혁명의 불길이 장백산기슭, 해란강반에서 타오르게 하고 연변에서 중국공산당의 눈부신 90년 려정을 시작하게 했다.
연변은 조국의 동북변강에 자리잡은 빛나는 명주로 동쪽으로 로씨야와 린접하고 남쪽으로 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마주한다. 18세기 중엽, 산동과 하북을 비롯한 관내 여러 지역에서 가난한 백성들이 기근을 피해 이곳으로 왔고 19세기 중엽에 조선의 가난한 농민들도 대량 이곳에 이주했다.
이 동북땅에 이주한 후로부터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이곳과 긴밀히 련결시켰고 이곳에 뿌리를 박았다.
20세기 초기에 일본제국주의는 연변에 침입해 식민통치기구를 설립했고 이때로부터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일제와 봉건군벌의 이중압박을 받았다.
로씨야 10월혁명의 승리, 특히 중국공산당의 건립은 압박 속에서 광명을 갈망하던 연변인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중공중앙에서는 동북의 당사업을 더없이 중시했다. 1927년 10월, 중공만주성림시위원회가 건립되여 봉천, 길림과 흑룡강 3개 성의 당사업을 령도했다.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일제와 봉건군벌의 이중압박과 통치를 받았기에 혁명투쟁 열정이 아주 높았고 군중기초가 좋았다. 중공만주성림시위원회는 연변의 정세를 분석한 뒤, 연변에 당조직을 건립할 시기가 성숙됐다고 판단했다.
1928년 1월, 관준언이 봉천에 와서《민성보》직원을 모집했다. 당시 만주성림시위원회 서기 진위인은 주동교더러《민성보》사 편집 초빙에 응하게 하여 이 기회를 빌어 그더러 연변지역에서 당조직 건립 사업을 전개하라고 했다.
주동교(일명 주춘휘)는 봉천사람으로 1907년에 태여났고 19세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의 아들 주역명의 말에 따르면 부친 주동교는 다재다능했고 여러가지 언어와 문자에 능했다고 한다.
1928년 2월, 주동교는《민성보》사 소재지인 룡정촌에 왔다. 그는 이곳에서《민성보》의 편집실무를 담당하는외에 요청을 받고 룡정의 대성중학교에서 한어를 가르쳤다. 당시 우리 당은 지하활동 상태였기에 사회적 직업의 엄호가 필요했다. 교원은 주동교에게 알맞은 직업이였다.
북경의 향산자유원은 우리 나라의 저명한 자선가와 평민교육가인 웅희령 선생이 1920년 10월에 향산의 정의원에 창설한 자선단체이다. 1925년에 중국공산당 북경서교구위에서 이곳에 당조직과 단조직을 건립하고 많은 교원과 학생들을 중국공산당과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시켰다.
웅희령 선생께서 초빙한 이곳의 교원들은 대부분이 5.4운동에 참여했었고 사상이 진보적이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가난한 고아들을 돌봤다. 이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압박과 착취를 받았기에 원한이 깊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상을 접촉하자 곧바로 격정이 치솟았고 각성이 아주 빨랐다.
1928년초, 연길, 훈춘, 화룡 등 현에서도 학교를 꾸리기 위해 길림성교육청에 위탁해 전국 각지로부터 소학교 교원을 모집했다. 북경 향산자유원에서는 선후로 두차례에 걸쳐 40여명의 졸업생을 연변에 교원으로 파견했다. 이들 가운데는 류건장과 조지강을 비롯한 17명의 당원과 단원도 있었다.
북경 향산자유원 졸업생인 장석준은 그 당시 류건장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1926년 8월의 어느 하루 우리의 로선배였던 류건장의 입당식이 이 건물의 교원사무실에서 진행됐습니다. 이때로부터 그는 혁명에 참가했고 새로운 정치생애를 시작했습니다.”
중공북경서교구위에서는 류건장을 연변에 파견하고 그더러 현지의 당조직과 련락을 취하라고 지시했다. 1928년 6월, 류건장이 룡정촌에 와 주동교와 조직관계를 맺었다. 주동교는 곧바로 이 일을 중공만주성림시위원회에 보고하고 이들 당원과 단원들을 기반으로 연변 각지에서 당조직을 건립할 것을 제안했다. 얼마 후, 만주성림시위원회에서는 이 제안을 비준했다.
주동교는 인차 류건장을 연길, 화룡과 훈춘 3개 현에 파견했다. 류건장은 그곳의 당원, 단원들과 련락을 취한 후 선후하여 7개 당지부를 건립했다. 1928년 8월 17일, 중공만주성림시위원회는 중공중앙에 보내는 편지에서 연변에 구위를 건립할 필요성과 긴박성을 설명했다. 얼마 후, 중공만주성림시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중공연변구위가 건립됐다. 주동교, 류건장과 조지강이 각기 서기, 조직위원과 선전위원을 맡았다. 구당위가 건립된 후 또 2개의 지부가 건립됐다.
1928년 10월, 중공연변구위는 산하에 9개 지부를 두었고 당원도 22명으로 늘었다. 9명의 당지부 서기는 전부 북경 향산자유원에서 초빙한 당원교원이였다. 구당위기관은 민성보사에 설치됐다. 중공연변구위의 건립은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혁명투쟁의 눈부신 력사를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연변에서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조직기구가 탄생했고 공산당이 연변에서의 한폭의 기치를 수립했으며 당이 연변 여러 민족 인민을 이끌고 반제반봉건 투쟁을 펼치는 령도핵심으로 됐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 후 당이 연변에서 발전장대할 수 있는 조직기초와 사상기초를 마련했다.
중공연변구위는《민성보》를 통해 일제의 침략야심을 폭로하고 민주와 진보사상을 적극 선전하면서 민중을 각성시켰다. 또《동만통신》을 꾸리고 황원학회를 조직하며 일제가 우리 나라 철도권을 강탈하는 것을 저항하는 투쟁을 벌렸다. 일본은 바로 철도를 리용해 동북에 대량의 병력과 무기 그리고 탄약을 운송하고 중국의 물자를 대량 략탈해갔다. 때문에 이 철도는 군사침략철도이고 략탈철도이기도 했다.
1928년 12월 29일, 봉계군벌이 국민당 쪽으로 넘어가면서 공공연히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1929년 1월 18일, 류건장이 주동적으로 구위서기직을 맡은 뒤 얼마 안돼 주동교는 공산당원 신분이 폭로되여 룡정역에서 체포된다. 바로 혁명선전물을 소지했다는 게 체포원인이였다.
파괴된 연변의 당조직을 회복하기 위해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왕경을 연변으로 파견했다. 1930년 2월, 중공연변특별지부가 화룡현 달라자에서 설립되였고 왕경이 서기직을 맡았다. 중공연변특별지부의 령도하에 연변 각지에서 기세가 드높은 ‘붉은 5월투쟁’이 일어났다. 화룡현 약수동에서 동북의 첫 쏘베트정권인 약수동쏘베트정부가 건립되였다.
1930년 8월 1일, 중공길돈선(吉敦线) 림시당지부의 령도하에 돈화와 액목(额穆) 두 현의 600여명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일본침략자들과 봉건군벌들에게 타격을 주고 군중 속에서 당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비록 희생도 많았지만 대오를 점검하고 경험도 쌓아 항일전쟁시기 반일유격대의 창건에 기초를 닦아주었다.
1930년,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의 원칙에 따라 많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만주성위는 심사를 거쳐 조건에 따라 중공당원으로 전환시켰다. 하여 동북지역의 당조직이 급격히 늘어났고 혁명력량도 증가되였다. 당시 동북의 1,200여명 당원중에서 600여명이 연변에 있었고 조선족과 한족은 당의 두리에 굳게 뭉쳐 반제반봉건 투쟁을 진행했다.
1930년 8월 13일, 동만 제1차 당원대표대회가 화룡현 약수동에서 열렸다. 중공연화중심현위가 설립되였고 왕경이 서기직을 맡았다.
1930년 10월, 연화중심현위를 바탕으로 동만특위로 략칭하는 중공동만특별위원회가 설립되였고 료여원이 서기직을 맡았다. 연화, 왕청, 훈춘, 안도, 돈화 등 현위도 잇달아 설립되였고 특위, 현위, 구위, 지부 등이 구전한 당조직체계가 형성되였다.
1930년, 류건장이 20살이 되는 해에 동만특위는 그를 훈춘현위 서기로 파견했다. 현성에서 머물 수 없었던 그는 비밀리에 훈춘 대황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그곳엔 80~90명의 조선족 공산당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통나무집에서 살았고 저녁이면 5~6명이 등잔불 밑에서 삐라를 등사하여 뿌렸다고 한다.
가렬처절한 혁명투쟁에서 일부 당조직은 적들에게 파괴되고 일부 지도자와 당원들도 체포되였으며 지어 적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되였다.
1931년 1월, 중공왕청현위 제1임 서기 김훈이 체포되여 연길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하지만 그는 투쟁을 이어갔다. 감옥에서 그는 당조직을 세우고 탈옥투쟁을 일으켰다. 1931년과 1932년, 김훈은 탈옥투쟁을 두차례 조직했지만 모두 반역자의 밀고로 실패하였다. 1934년 12월 26일, 적들은 김훈을 살해하고 시신을 부르하통하의 얼음구멍에 던졌다.
1931년 2월 1일, 중공왕청현위 제2임 서기 김상화가 체포되였다. 그는 당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31세밖에 안되는 젊은 생명을 바쳤다. 그를 살해하고 나서 작두로 그의 머리를 자른 뒤 마대에 넣고 마을을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 나서 큰 느릅나무에 걸어두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주의는 공공연히 ‘9.18사변’을 일으켰다. 이에 맞서 중국공산당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행위를 견결히 반대하고 중국인민을 이끌고 14년간의 항일전쟁을 벌렸다.
1932년 2월 8일, 원 동북륙군 독립 제27려 ‘로삼영’ 영장 왕덕림이 연길현 소성자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중국국민구국군을 건립했다. 화룡현 경찰대대 순찰관이였던 시세영을 비롯한 원 동북군 애국장병들과 애국인사 및 청년학생들이 다투어 국민구국군에 가입했다.
당시 시세영은 경찰신분이였고 순찰관까지 되였다. 지위가 있고 재산도 많았지만 애국심이 아주 강했다고 한다. 그는 일제식민통치하에서 조선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직접 목격하고 중국인이나 동북인들이 조선인의 전철을 밟을 수 없다며 일떠나 항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구국군 장병들은 반드시 일제를 중국에서 몰아내겠다고 사기가 충천했다.
왕덕림의 항일구국군에는 각급 당조직에서 파견한 당원과 단원들이 많았다. 구국군의 주요 골간으로 된 그들은 나중에 동북항일련군의 주력군으로, 항일의 이름난 장령으로 되였다. 왕덕림의 손녀의 기억에 따르면 할아버지인 왕덕림이 주보중과 대화를 나누는데 주보중은 견식이 넓고 하는 말이 모두 옳아 할아버지는 그를 인재라고 하면서 신변에 남겨 참모를 하게 했다고 했다.
중공동만특위의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1931년 11월, 중공만주성위는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중공대련시위 서기였던 동장영을 중공동만특위 서기로 임명하고 연변에 파견했다. 12월 16일, 중공동만특위는 옹성라자에서 동만 4개 현 책임자들이 참가한 당원 및 단원 적극분자회의를 열었다. 동장영은 연변에 도착한 후 당중앙과 중공만주성위의 무장항일의 방침과 정책을 견결히 관철집행했다. 그의 령도하에 연변 각 현에서 반일유격대를 건립하게 되였다. 항일유격대는 끊임없이 유격지역을 넓혀갔다. 소왕청을 비롯한 10개 곳에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했고 근거지 인구도 2만여명으로 늘었다. 동남만항일유격지역에서 길림성 경내에는 13개 중요한 항일근거지가 있었는데 그중 12곳이 연변지역에 있었다.
연변 각급 당조직은 끊임없이 확대되였다. 1933년 9월에 이르러 동만특위는 4개 현위, 90개 지부, 965명의 당원으로 발전했다. 당의 령도하에 연길, 훈춘, 화룡, 왕청 등 4개 현의 유격대는 신속히 발전해 연변지역의 ‘정치력이 가장 강하고’, ‘기술력이 가장 뛰여난’ 항일무장으로 되였다. 항일의 봉화가 세차게 타오를수록 일제와 그 괴뢰들의 ‘토벌’은 더욱 창궐해졌다.
1933년 2월 12일, 일본군과 그 괴뢰군 500여명이 화룡현 어랑촌 항일유격근거지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근거지 군민들은 용감히 일떠나 6시간 남짓이 격전을 벌려 적군 60여명을 사상했다. 하지만 중공화룡현위 서기 최상동, 유격대 중대장 김세 등 13명 유격대원들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1934년 3월 21일, 중공동만특별위원회 서기 동장영이 특위기관 동지들과 부분적 유격대원들과 함께 동광진 묘구일대에서 적들에게 포위당했다. 포위를 돌파할 때 동장영이 총에 맞아 희생되였는데 당시 나이가 27세밖에 안됐다.
1932년부터 일본군과 괴뢰군은 잇달아 연변에서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여 음흉한 수단으로 당이 령도하는 항일무장력량과 인민군중 사이의 련계를 끊어놓고 연변인민들의 항일의지를 꺾으려 했다. 하지만 적들의 음모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연변의 항일무장은 소멸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발전되고 장대해졌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4개 현에 유격대를 건립한 토대하에 선후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건립하고 1936년 3월에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하였다.
왕덕태가 령도한 동북항일련군 제2군은 항일기치를 높이 들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사람이 넘어지면 뒤사람이 이어나가는 정신으로 불요불굴하게 일본침략군과 용감히 싸워 항일구국의 민족대업을 위해 불멸의 업적을 세웠다.
1936년 7월 7일, 동북항일련군 제2군과 제1군이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으로 통합편성되였다. 동만과 남만 당조직은 중공남만성위로 합병되고 위증민이 서기직을 맡았다. 새로 건립한 동만특별위원회는 동만의 각 현과 새로 건립한 무송과 장백 등지의 당조직을 책임지고 령도하였다. 그 후 양정우와 위증민은 남만땅에서 어깨겯고 싸웠다. 당의 정치보장 역할도 잘 발휘해 정치사상 사업도 아주 잘했는데 항일련군 제1로군의 전반 자질은 전 동북항일련군중에서 가장 좋은 한개 부대였다.
1937년 7월 7일, 전국항일전쟁이 폭발했다.
항일련군 제1로군은 주동적으로 출격하고 협동작전하여 일본군의 입관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전국항전을 지원하고 배합하였다. 항일련군전쟁사에서 대사하전투는 아주 유명하다. 진한장은 적정변화에 근거하여 작전을 바꿔갔기에 전투가 순조롭게 진행되였다. 이번 전투는 진한장의 출중한 지휘능력을 보여주었다. 
도조히테끼는 제2차세계대전의 갑급 전쟁범이다. 그는 중국을 침략하고 태평양전쟁을 발동한 주요 범인으로서 전쟁이 끝난 뒤 사형을 당했다. 도조히데끼의 계획하에 일본 관동군은 ‘만주국 치안숙청대강’을 제정하고 만주괴뢰당국은 ‘3년 치안숙청계획’을 제정하여 동북항일련군에 대해 군사적으로 토벌하고 정치적으로 와해하며 경제적으로 봉쇄하였다. 심산 속에 있는 이런 비밀숙영지들은 적들에게 파괴당하거나 불태워 없어졌다. 항일련군 제1로군이 가장 간고한 시기에 들어섰다.
로전사들은 당시 큰 마을에 들어갈 엄두를 못 내고 산속에 숨어 먹을 게 없고 입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는 막심한 곤난 속에서 풀뿌리와 눈을 녹여 먹으며 겨우 견뎠다. 그러다 독버섯을 먹고 중독된 사람도 있었고 며칠씩 굶기가 일쑤였다. 겨울이면 특히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는데 깊게 쌓인 땅을 파고 나무뿌리를 캐먹었다고 한다.
1938년말, 남은 건 오직 중국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부대 뿐이였다. 1940년 2월 23일,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사령원 양정우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중병에 걸린 위증민이 제1로군을 거느리고 일제와 싸우는 중임을 떠멨다. 적들의 미친듯한 토벌은 공산당의 굳센 의지와 견정한 신념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위증민, 왕덕태, 동장영, 조아범, 주수동, 진한장 등은 연변 당조직의 우수한 지도자이자 동북항일련군의 고급 장령들이다. 이들은 중화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백산흑수를 넘나들며 일본침략자들과 힘든 투쟁을 펼쳤고 피 흘려 싸웠다.
렬사들의 피는 헛되이 흐르지 않았다. 14년의 간고한 투쟁을 거쳐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은 전국인민과 함께 항일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맞았다. 이날을 위하여 3,000여명 렬사들이 자신의 귀중한 생명을 연변땅에 바쳤다.
해방전쟁시기 연변의 5만여명 아들딸들이 참전하고 3,000여명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오늘 창립되였습니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 주석은 북경 천안문성루에서 전세계에 새 중국의 건립을 장엄히 선포했다. 새 중국 건립의 례포소리 속에서 연변 여러 민족 인민은 전국인민과 함께 중국력사의 새로운 기원을 열어가는 위대한 려정을 시작했다.
“산마다 진달래꽃이 만발하고 마을마다 렬사비가 솟아있네.” 중국공산당의 견정한 령도하에 우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은 항일전쟁시기와 해방전쟁시기에 큰 희생과 공헌을 하였다. 사람들은 새 중국의 건립과 중화민족 해방사업을 위하여 목숨 바친 렬사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1979년, 국가에서는 정식으로 연변의 8개 현, 시를 혁명로근거지로 비준했다. 혁명로근거지는 중국혁명의 리정표이자 새 중국의 요람이다. 혁명로근거지정신은 귀중한 정신적 재부이고 풍부한 정치적 자원이다. 혁명로근거지의 휘황한 력사는 새시대에 계속 전진하도록 격려하는 무궁한 동력이다.
새시대에 연변 당조직의 창건력사를 학습하는 것은 우리가 력사경험을 학습하고 혁명전통을 고양하며 우리의 위대한 혁명정신을 계승하고 초심을 잃지 않고 사명을 아로새기며 민족단결을 잘하고 당의 령도하에 우리의 길림을 더욱 잘 건설하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1928년, 중공연변구위원회는 9개 지부, 22명 당원밖에 없었다. 1949년, 중공연변지방위원회는 5개 현위, 52개 구위, 440개 당지부, 5,244명 당원으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중공연변주위는 8,000여개 기층당조직과 17만 7,000여명 당원을 령도하고 있다. 진붉은 당기의 인솔하에 연변, 이 창상지변을 겪은 혁명로근거지는 휘황한 90여년 려정을 걸어왔다.
“초심을 잃지 말고 사명을 아로새기자.”
중공연변주위는 전 주 여러 민족 인민들을 이끌고 습근평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두리에 굳게 뭉쳐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초요사회를 전면 건설하고 새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중국꿈을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분투하고 있다.  
편역: 리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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