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24-01-15 11:21:56
(전호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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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호천(1932-2016)
조선족이며 길림성 룡정시 사람이다. 1951년에 사업에 참가했고 1956년 12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룡정현우전국 덕신지국 향촌 우편배달원, 연변주우전국 부국장을 력임했다. 1952년부터 30년 동안 루계로 62만 7000여킬로메터를 돌아다녔고 973만여부의 신문과 잡지, 62만여통의 편지를 배달해주었으며 연도의 군중들을 위해 1만 5000여건의 송금을 대행해주었는데 한치의 착오도 없었다. 1956년과 1959년에 전국선진생산자대표대회, 전국군영회(群英会)에서 전국선진생산자 칭호를 받았다. 선후로 모택동과 주은래 등 국가 지도자의 접견을 7차 받았다. 1960년, 그를 원형으로 한 영화 《기러기》가 촬영되였다. 1982년, 리호천은 퇴직한 후에도 7년간 의무적으로 신문배달원으로 일했다.
 
“한평생 향촌 우편배달원으로 일하며 인민을 위해 봉사하겠다.” 영화 《기러기》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이다. 향촌 우편배달원 리호천을 원형으로 한 이 영화는 196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51년, 소학교를 졸업한 리호천은 초중에 합격했지만 집이 가난하여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우전국 배달원이 되면 식량을 받을 수 있었기에 그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향촌 우편배달원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팔도우전분국에는 6개 우전소가 있었는데 배달원이 우편물을 우체소까지 배달한 뒤 이를 다시 수령인에게 배달했기에 2, 3일씩 지연되는 것은 흔한 일이였고 4, 5일씩 지연되는 경우도 있었다. 리호천은 배달시간이 지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편경로도에 50여개 우체소를 그린 뒤 각각의 우체소마다 소속 지역을 표시해 최적의 배달경로를 선택했다. 1952년부터 1957년까지 5년 동안 리호천은 12만 6467킬로메터의 길을 걸었는데 이는 지구 적도 네바퀴를 돈 거리에 맞먹었으며 그가 배송한 편지는 6만 8000통, 소포는 292개나 되였다.
우정사업이 발전하면서 신문과 잡지, 소포, 송금표 등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리호천은 어떻게 하면 우편물을 제1시간에 수령인에게 전달할가 하는 문제를 늘 고민했다. 그 후 리호천은 트럼베트(小号)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사원들은 트럼베트 소리가 들리면 리호천이 우편물을 배송하는 것임을 알았고 우편물을 받으러 나왔다. 이 방법은 우편사업의 난도를 낮추는 동시에 효률을 높였으며 사업상의 많은 어려움을 덜어주었다. 이는 또한 전국 우전계통에서 최초로 발명한 ‘트럼베트 사업법’이였다. 
그는 20년 넘게 트럼베트를 불면서 덕신구의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는 전 구역의 일초일목과 구석구석을 손금 보듯 알았으며 집집마다에 익숙한 그의 발자국을 남겼다. 리호천은 사업을 소홀히 대한 적이 없었으며 언제나 만강의 열정으로 성실하게 일했다. 최대한 빨리 우편물을 보내기 위하여 민정조리와 마을 치안보위주임의 도움으로 전 구역 마을 가구수, 집집의 호주, 인원수, 성별, 년령, 본적, 문화수준을 포함한 상세한 등록카드를 만들었다. 그중에는 30년 이래 이사했거나 사망했거나 새로 입주한 사람 및 호주의 별명까지 포함되여있었다. 리호천은 자기 관할범위내 7000여 농가의 정황을 줄줄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고 소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누구 집 자녀인지까지 환히 꿰뚫고 있었다. 하여 연변우전계통의 사람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사전’, ‘살아있는 지도’라고 친절하게 불러주었다.
1959년, 리호천은 영광스럽게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인민대회당에서 모택동과 주은래, 주덕, 류소기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대경유전의 ‘철인’ 왕진희가 유명해지기 전에 리호천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 로동자 대표였다. 대회기간, 리호천은 조직의 배치에 따라 48개 나라 기자의 합동취재를 받았다.
1960년, 장춘영화제작소는 장천민 극본의 영화 《기러기》를 제작했는데 주인공의 원형이 바로 리호천이였다. 우전계통의 조선족 향촌 우편배달원의 사업과 생활을 전국 최초로 다룬 이 영화는 쏘련, 윁남, 조선 등 나라에서 상영되였다.
리호천은 1982년 퇴직한 이후에도 7년간 의무적으로 신문배달을 했으며 2016년 2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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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영(1926-2018)
길림성 연길시 사람이다. 1952년 11월에 사업에 참가하고 1953년 1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동북사범대학 맑스-레닌주의 교연실 부주임, 당사 교연실 주임, 정치교육학부 부주임, 모택동사상연구소 소장, 부교장, 명예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등 직무를 력임했다. 우리 나라 저명한 중공당사전문가이자 맑스주의 중국화 연구의 중요한 개척자이고 창시자이다.
 
정덕영은 일생동안 중공당사, 모택동사상과 맑스주의 중국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리론체계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연구에 힘써왔으며 학술저서 40여권을 출간했다. 《구시》, 《맑스주의연구》 등 수준급의 간행물에 260여편의 학술론문을 발표하여 중공당사학과의 연구분야를 개척하고 리론토대를 닦아놓았으며 호교목, 호승, 호화 등 저명한 중공당사 학자들의 긍정을 받으며 국내외에서 높은 학술명성을 자랑한다. 그중 《모택동사상 사고(毛泽东思想史稿)》는 국내에서 모택동사상을 연구한 최초의 저서로서 모택동사상사의 과학적 체계를 개척한 선례로 되였다. 《모택동과 맑스주의 중국화》에서는 모택동이 맑스주의 중국화의 정초자이며 맑스주의로 중국혁명을 지도한 진리는 중국화된 맑스주의에 있다는 독보적인 견해를 처음으로 제기했다. 《모택동사상개론》은 최초로 모택동사상의 개론체계를 세운 저작으로서 여러 대학과 중공중앙 당학교에서 널리 채택되였다.
정덕영은 저술을 견지하는 동시에 시종 ‘당사로 국정을 돕고 사람을 교양하는(党史资政育人)’ 사회적 사명을 아로새기고 실천했으며 자신의 학술사상과 리론성과로 당의 기본리론과 기본로선, 기본경험을 선전하고 설명했다. 전국 각지의 당사 교원과 당사 사업자들을 위해 강연을 펼쳤는데 75세의 고령에도 장춘, 사평, 통화 등 지역에서 12차례 선전강연을 하여 많은 간부와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60여년의 교육생애에서 정덕영은 우선 ‘덕육우선’을 학생양성의 전반 과정에 관통시키고 그들이 맑스주의 리상과 신념을 확고히 하고 당의 영광스러운 전통과 우량한 기풍을 계승하며 당의 사업을 위해 꾸준히 분투하려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높이도록 선도했다. 다음 시종 학생들의 독립적인 과학연구 능력 양성을 중요목표로 ‘독서, 사고, 토론, 질의응답, 교류’의 개방식 교수모식을 실시했다. 정덕영이 평생 양성한 제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박사연구생만 해도 49명이 된다. 그중 여러명의 학생이 중공당사 학과와 모택동사상 연구분야에서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로 되였으며 기타 분야에서 선줄군으로 있는 인재들도 많다.
60여년간 정덕영은 길림성의 유일한 정치리론과목 교원 대표로 전국 회의에 참석하여 모택동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그의 인솔하에 설립된 동북사범대학 중공당사 박사과정은 전국 대학교에서 최초로 설치한 3개 중공당사 박사과정중의 하나이며 그가 주관한 동북사범대학 모택동사상연구소는 교육부에서 평가한 전국 대학교 147개 사회과학연구기구에서 첫자리를 차지했다. 이외에도 정덕영은 국무원의 정부 특별수당금을 받고 교육부 대학교 사회과학연구 우수성과 2등상을 2차례, 3등상을 1차례 수여받았으며 국가교육위원회에서 주최하는 증헌재교육기금회 교원상 2등상을 1차례 수여받았고 길림성 제2패 성에서 관리하는 전문가로 선정되였다. 또한 여러차례 길림성 우수공산당원, 길림성 대학교 우수공산당원 기준병, 길림성 우수교원, 길림성 교육계통 사덕 선진개인, 장춘시 로력모범, 장춘시 사덕모범, 동북사범대학 우수공산당원, 모범교원, 선진사업자 등 영예칭호를 받았다.
2018년 5월 3일, 정덕영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6월, 중공중앙은 정덕영에게 ‘전국 우수공산당원’ 칭호를 수여했고 12월 18일, 중공중앙과 국무원은 정덕영에게 ‘개혁선봉’ 칭호와 개혁선봉 메달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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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재덕(1917-2019)
녀, 조선족이며 조선 평안남도에서 태여났다. 1920년에 부모를 따라 중국 단동으로 이주했다가 1924년에 흑룡강성 라북현으로 이전했다. 1932년 겨울에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여 구단위 위원을 맡았으며 1936년 7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동북항일련군 제3군에서 무선전련 전사로 있었다. 1945년, 길료군구, 길림성군구 무선전신국에서 일하다가 연변조선족간부학교 부과장, 길림성 화룡현부녀련합회 주임을 력임했다. 1949년에 하북성 의창시부녀련합회 준비처 주임으로 있다가 1950년에 정무원(이후 국무원으로 개칭) 비서처 비서, 부과장, 유치원 원장, 도서관 주임을 맡았다. 1982년, 리재덕은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판공청 비서국 부국장을 지내다가 그해 9월에 리직휴양했다. 리직 후 북경에 거주했으며 회고록 《송산풍설정》을 남겼다.
 
리재덕은 1932년 2월에 탕원중심현당위에서 조직한 반일선전대에 참가하고 1934년 2월에 탕원반일유격대에서 호리원으로 일했다. 1937년 8월, 동북항일련군 제3군 류수처 및 제4사 피복공장에서 근무하다가 1938년 12월에 쏘련으로 건너가 무선전 업무를 배웠다. 1939년, 조상지를 따라 귀국한 리재덕은 동북항일련군 사령부 기관당지부 부서기, 대대 지도원 및 전보번역원으로 있었다. 1941년 7월에 항일련군 2로군 2지대 동북소부대에서 활동하면서 무선전신국 사업을 책임졌다.
1942년 12월, 리재덕은 쏘련항일련군 교도려(88려) 무선전영의 전사로 되였다.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제외하고 리재덕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전보의 접수와 발송을 배우는 것이였다. 1941년부터 1942년까지 리재덕은 소분대를 따라 여러차례 동북으로 돌아와 흑룡강 삼강지역의 일제침략군 병력, 무기장비 등 군사정보를 정찰했다. 그리고 밤이 깊어 일본괴뢰군이 가장 해이해진 틈을 타서 전보로 88독립려에 정보를 보냈다. 1945년 12월, 리재덕은 쏘련에서 귀국하여 길료군구 사령부 무선전신국에서 사업했다.
1948년 3월, 리재덕은 길림성부녀위원회 위원, 연변조선족간부학교 조직과 부과장을 지냈고 9월에는 화룡현당위 위원, 부녀련합회 주임을 맡았다. 그해 10월, 화룡현부녀사업위원회가 설립되고 리재덕은 서기를 겸임했다. 그녀는 짧디짧은 몇달 동안 녀성들을 이끌고 동원하여 혁명로구역 부녀사업의 영예로운 전통을 계승발양하여 봉건적 속박을 깨뜨리고 정치무대에 오르도록 하여 진정한 의미의 녀성해방을 실현했다. 또한 전 현 각 구에서 모두 부녀위원회를 내오고 각 촌에 부녀위원을 두도록 지도했다. 생산을 틀어쥐고 전선을 지원하는 데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녀성들을 생산에 참가시켰고 남성동지들을 동원하여 참군시키고 담가대에 참가하게 했으며 식량을 절약하여 전선을 지원하며 전사들을 위해 옷, 신발, 양말 등을 만들 것을 호소했다. 그녀의 인솔하에 군중들은 전선을 지원하고 승리의 결실을 지키려는 열성이 높아 매번 임무를 넘쳐 완수할 수 있었다.
1949년 2월, 리재덕은 47군 후방류수처 가족학교 제1구대 부대장을 맡았고 6월에는 호북성 의창시부녀련합회 준비처 주임으로 부임했다. 1950년 3월에는 북경 정무원 비서처로 자리를 옮겨 기요비서, 당지부 위원으로 되였다. 새 중국이 창건된 후 리재덕은 북경 정무원 비서청에서 사업하면서 주은래 총리의 기요비서를 맡고 정무원의 공인과 주은래의 도장을 책임지고 관리했다. 그녀의 사업이 당의 기밀과 관련되였기에 리재덕 부부는 다년간 자기의 사업내용에 대해 비밀을 엄수했고 자식들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부모가 항일련군 로전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1955년,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판공청에 전근되여 비서처 부과장, 유치원 원장, 도서관 주임 등 직무를 력임했고 1964년에 제3기 전국인대 대표로 당선되였다. 1978년 4월, 전국부녀대표대회에 참석하고 1979년에 도서관 주임(부국급) 직을 회복했다. 1982년, 리재덕은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판공청 비서국 부국장을 맡았다가 같은 해 9월에 리직휴양하고 북경에서 거주했다. 리재덕은 2019년 8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사명》에서 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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