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당간행물들 주제취재활동 펼쳐
날짜 2021-07-09 13:43:15
올해는 당창건 100돐이다. 100년 전 중국공산당은 비바람이 몰아치던 옛 중국에서 탄생했다. 100년 후 중국공산당은 당원수가 9100만명을 넘는 세계 제일의 정당으로 거듭났다. 1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중국인민과 중화민족은 부유하고 강대해졌으며 떳떳하게 일어섰다.
당의 력사를 잊지 않고 초심과 사명을 다시 아로새기기 위하여 중국정기간행물협회 당간행물분회에서는 ‘당창건 100돐 경축·당사 학습, 교양’ 주제년회 및 ‘당창건 100돐 경축·여름, 겨울 올림픽 주최도시 방문’ 대형 주제 취재활동을 펼쳤다. 지난 6월 21일부터 6월 23일까지 전국 각 성, 시, 자치구에서 모인 당간행물 편집기자들은 중국공산당 초기의 혁명활동장소인 북경 리대소 옛집,《신청년》편집부 옛터(진독수 옛집), 경보관 옛터(소표평 옛집), 도연정자비암 등 중국공산당 초기 활동장소를 방문해 초기 공산당원들의 초심과 사명을 깊이 느꼈다.
중국혁명 ‘불씨의 전파자’
북경시 서성구 문화골목에 들어서면 벽에 씌여진 ‘철 같은 어깨로 도의를 짊어지고 절묘한 수법으로 문장을 짓는다.’는 구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리대소의 정신풍모를 진실하게 말해준다.

리대소 선생 반신조각상.
안내판에 따라 리대소의 생가를 찾아 붉은색 칠을 한 대문에 들어서니 리대소 선생의 반신동상이 꽃 숲속에 자리해있었고 배경에는 리대소가《신청년》,《매주평론》,《로동자주간》등 잡지에 발표한 글들이 있었다.
리대소 옛집은 남, 북 두개의 안뜰로 나뉘는데 북쪽 본채에 들어서면 바로 중식 중당의 장식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진독수, 등중하, 장사소 등 많은 혁명동지와 벗들을 접대했다.
서쪽의 곁채는 당조직의 초기 활동시 회의실로 사용되였다. 서재 문을 열어보면 방안에는 검은색의 낡은 풍금 하나, 책장 몇개, 책걸상이 진렬되여있다. 이는 리대소 선생의 자녀, 친구, 학생들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복원하여 진렬했는데 리대소가 집을 기지로 삼고 혁명활동을 전개했던 장면을 생동하게 보여준다.
검은색 낡은 풍금은 리대소가 선무문(宣武门) 두발(头发)골목 중고시장에서 사온 것인데 이 풍금으로 리대소는 자녀들에게 <국제가>, <소년선봉대의 노래> 등 혁명가요를 배워주었다.
남쪽 마당의 ‘불씨의 전파자-리대소 혁명사상과 실천’ 주제전시관 입구에서는 1924년, 리대소가 모스크바 대극장에서 연설했던 영상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흘러나온다. 이 8초짜리 흑백영상자료는 리대소가 생전에 남긴 유일한 영상자료이다.
1927년 4월 6일, 리대소는 봉계반동군벌에게 체포되였다. 4월 28일, 그는 교수대 앞에서 몸을 꿋꿋이 세우고 “당신들이 오늘 나를 교살한다 해도 위대한 공산주의는 교살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많은 동지들을 육성했고 마치 붉은 꽃의 씨앗처럼 곳곳에 뿌려져 우리 공산주의는 세계, 중국에서 반드시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연설했다.
전간(箭杆)골목에서 출발한 《신청년》
청회색의 작은 골목을 지나 북지자(北池子) 전간골목 20호의 얼룩덜룩한 나무문을 열자 한쪽 켠에 ‘《신청년》편집부(옛터)’라는 패말이 눈에 들어왔다. 취재진이 찾은《신청년》편집부 옛터는 진독수의 옛집이기도 하다.
100여년 전, 신문화운동의 흥기는 중국대지의 많은 열혈청년들을 일깨웠다. 볼품없는 이 건물이 바로 신문화운동의 사령부였다.
1917년, 상해에서 창간된《신청년》편집부가 북경으로 옮겨간 후 진보사상을 지니고 있던 많은 애국지식인들이《신청년》을 진지로 삼고 전국을 휩쓴 신문화운동의 고조를 일으켰다. 1918년 5월, 중국현대문학사상 첫 백화문소설인 <광인일기>가《신청년》에 발표됨으로써 신문화운동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당시《신청년》편집부에는 선진지식인들이 집결되여있었다. 리대소, 로신, 호적, 전현동, 류반농 등 지식인들은 편집부에서 사업하면서 민주, 과학의 기치를 높이 들고 손에 든 필로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문화를 전파했다.
로씨야 10월혁명 이후,《신청년》은 맑스주의를 선전하는 중요간행물로 되였다. 1923년 6월,《신청년》은 중공중앙 기관리론 간행물로 되였다가 1926년 7월에 정간되였다.《신청년》은 창간되여서부터 정간되기까지 ‘5·4’운동 후 신문화운동의 활발한 전개와 맑스주의가 중국에 널리 전파되기 시작한 력사적 과정을 목격했다.
1918년 11월 15일,《신청년》제5권 제5호에 리대소의 <서민의 승리>, <Bolshevism의 승리> 두편의 글이 실리면서 10월혁명이 일으킨 조류를 막을 수 없다고 예언을 했다. ‘5·4’운동이 폭발한 후, 리대소는《신청년》제6권 제5호에 <맑스주의연구> 전문란을 개설하여 맑스주의에 대해 비교적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소개를 진행했다.

《신청년》편집부 옛터(진독수 옛집) 내부경관.
바로 이 작은 건물에서 전후로 근 30기에 달하는《신청년》잡지가 편집, 출판되였다. 맑스주의가 중국에서 초기 전파된 주요한 담체로서 중국의 열혈청년들에게 심원한 영향을 주었다.
전설적인 신문인의 혁명적 기개
북적거리는 채시구(菜市口) 교차로 어구에서 한적한 골목으로 접어들어 10분 정도 걸어가다 보면 서성구 춘수거리(椿树街道) 위염(魏染)골목 30호, 32호에 이른다. 푸른색 벽돌과 회색 기와 사이에 중국과 서양의 양식을 혼합해 지어진 2층짜리 건물이 보이게 되는데 이곳은 바로 ‘경보관’ 옛터이다. 일찍 맑스주의 전파의 전초지이자 소표평(邵飘萍)의 옛집이기도 하다.

경보관 옛터 외부경관.
신문사 건물 출입문 우에 ‘경보관(京报馆)’이라는 세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소표평이 직접 썼던 글씨로 생명으로 광명과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분투했던 한 비밀공산당원의 발자취를 말해주었다.
《경보》는 북양정부시기 북경에서 출판된 진보적인 신문으로서 소표평이 1918년에 창간했다. 소표평은 붓을 들어 ‘무쇠어깨와 매서운 손’이라는 글자를 써서 편집실에 걸어놓고 자신을 격려했다.《경보》는 시대의 페단을 과감히 비판하고 민중을 위해 소리를 내며 사회와 국가의 운명을 주목함으로써 당시 북경에서 가장 명성과 영향력을 가진 신문의 하나로 되였다.
경보관 옛터를 거닐다 보면 소표평의 휘황찬란한 짧은 일생과 국가의 중대한 력사가 교차됨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경보관 2층에 올라서니 1923년 5월 5일,《경보》에서 출판한 <맑스 기념특간>이 눈에 띄였다. 이날은 맑스 탄신 105돐 기념일이였는데 특간에는 맑스의 초상과 <맑스전>, <맑스저작사>, <맑스 기념일의 감상> 등 문장이 실렸다. 또 맑스의 <전투의 운률>, <광명> 등 두편의 시도 게재되였다.
소표평의 일생은 ‘신문을 위해 태어났고 붓을 총으로 삼다.’고 묘사할 수 있다. 해설원의 소개에 따르면 소표평은《한민일보》에서 사업할 때 3차례나 체포되여 9개월간의 투옥생활을 했다고 한다. 1915년, 그는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에 있는 동안 도꾜통신사를 설립하였다. 신문 발행, 투옥, 망명, 신문 재발행은 소표평의 짧은 생애에서 반복되는 키워드였다.
1925년,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신문을 진지로 삼고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맑스-레닌주의를 전파했으며 ‘10월혁명’을 소개하고 ‘외국 략탈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발표했다.
세월은 흘러도 정신은 영원히 남았다. 노란색으로 빛나는 력사화폭 속에서 이 전설적 신문인의 정신홰불은 더욱 많은 후세사람들을 격려하여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고 있다.
혁명사업의 비밀장소
100여년 전 도연정공원에서 리대소,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공산당의 창시자와 선구자들이 비밀리에 혁명활동을 전개하면서 발자취를 남겼다. 오늘날, 이곳은 이미 북경시 애국주의교양기지, 국가 4A급 관광지로 거듭났다.
취재진은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한계단 한계단씩 올라가며 오래된 회화나무 아래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1920년 1월 18일, 모택동은 북경에 있는 호남보인학사 성원들과 함께 모여 호남군벌 장경요를 쫓아낼 투쟁과 관련해 상의하고 구국의 길을 토론하였다. 회의가 끝나고 이 옛 회화나무 밑에서 그들은 진귀한 기념사진을 남겼다.
1921년 여름, 리대소는 자비암에서 남쪽방 두칸을 세맡아 중국공산당 북경당조직의 비밀장소를 건립했다. 1921년-1923년 사이, 리대소, 등중하, 고군우가 자비암에서 비밀혁명 활동을 진행했다.
자비암 북쪽 곁채에 들어서니 방안은 긴 탁자와 정연하게 놓인 네모난 의자가 놓여있었다. 이 물건들은 당시 리대소, 주은래, 등영초, 등중하 등이 회의를 소집한 상황을 기록했는데 바로 유명한 ‘5단체 회의’이다. 벽에 걸려있는 옛날 흑백사진들이 그 중요한 력사적 순간을 기록했다.
1920년, 주은래 등 동지들은 체포된 학생들을 구출하다가 천진에서 경찰청에 구류되였다. 출옥 후 주은래는 모든 사회단체를 련합하여 공동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같은 해 8월 16일, 리대소가 지도한 북경소년중국학회와 주은래가 지도한 천진각오사, 로동학습호조단, 서광사, 인도사 등 5개 단체의 20여명 대표들이 북쪽 곁채에서 다과회를 열고 구국운동 방향 등 문제를 함께 토론했다.
이틀 뒤, 5단체 대표들이 북경대학 통신도서관에 모인 가운데《개조련합선언》과《개조련합약장》을 론의하고 통과시켰다. 회의는 “단결 련합하자”, “옛 중국을 개조하자”는 구호를 부르면서 강력하게 맑스주의의 전파를 촉진했고 혁명사업의 발전을 추동했다.
취재진이 호심도 서측에 위치한 솔 숲속으로 들어서니 두 묘비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중국공산당 최초의 당원중의 한사람인 고군우 렬사와 그의 련인 석평매의 묘비이다. 묘비 왼쪽에는 두 사람의 조각상이 우뚝 서있고 주변에는 푸른 소나무가 줄지어 서있어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마련하였다.
고군우는 당의 제2차 대표대회 대표, 중국공산당 북방지구 책임자로 있었다. 1925년에 고군우는 병으로 서거하여 도연정호수가에 묻혔다. 3년 후 그의 련인 석평매는 슬픔 속에서 병을 앓다 불행하게 세상을 떴고 고군우의 묘 옆에 안장되였다. 반세기 남짓한 동안 혁명적 동반자의 변함없는 사랑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고군우, 석평매 조각상.
력사는 가장 훌륭한 교과서이고 정신적 영양제이다. 전국 각 성, 시, 자치구의 당간행물 편집기자들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로정에서 습근평새시대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의 인도하에 새로운 기상을 끊임없이 펼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당의 빛나는 사서에 새로운 광채를 더해줄 것이라고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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