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조선족축구 거장 리광수
날짜 2022-08-11 13:43:12

지난 2012년 7월, 선후로 다섯번이나 중국국가축구팀의 감독을 맡았던(1963년부터 1986년 사이) 년유사(年维泗)가 연변을 찾았다. 중국축구계의 태두로 불리는 년유사는 그번 연변행에서 연변축구의 부활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연변축구 중진웅풍(延边足球 重振雄风)’이란 글발을 남겼다. 그때 그는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중국조선족축구건장들을 꼽았는데 그중에 특히 ‘중형 땅크’란 별호까지 언급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중국조선족축구계의 거장-리광수(1930년-2002년) 선생이다.
1930년 4월 5일, 리광수 선생은 룡정시 조양천진 덕신촌의 한 농민가정의 2남 1녀중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어릴 적부터 신체소질이 좋았던 그는 뛰여난 총기와 천부적인 운동자질을 갖고 있었다. 8살 때부터 조무래기들과 어울려 축구를 즐긴 그는 소학교로부터 중학교에 이르기까지 학교축구팀의 주력공격수로 맹활약했다. 거기에 륙상, 배구, 롱구 등 운동에도 능했으며 학교에서의 학습성적도 늘 학년에서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던 1950년 연변제1고급중학교에서 공부하던 그는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호소에 응하여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했고 항미원조 전선에 나갔다.
중국인민지원군 38군 114사에서 전령병으로 있던 그는 1953년 3월, 지원군 총정치부의 전근령을 받게 된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싶이 하며 도착해보니 놀랍게도 지원군 축구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원군총부에서는 1951년에 축구팀을 꾸렸었는데 팀 선수들이 너도나도 지원군에 입대한 리광수를 추천하기에 오래전부터 그를 수소문했다는 것이였다. 지원군축구팀에 입단해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던 선생은 전쟁이 끝나자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일념에 단연히 ‘8.1팀’의 높은 대우도 뿌리치고 귀향했다. 허나 그가 학업에 정진하려고 할 때 상급에서 또 한번 그를 찾았다. 길림성축구팀을 창단하려고 하는데 주력멤버로 나서달라는 것이였다. 대학공부가 꿈이였으나 “운동을 하는 것도 나라와 인민의 수요”라는 상급의 말에 그는 주저없이 축구를 선택했다. 1954년, 전선에서 3등공을 세우고 그해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던 그였던 것이다!
 

1955년 8월, 드디여 길림성축구팀이 고고성을 울렸다. 그때로부터 길림성축구팀에는 ‘리광수’란 웅장한 체격에 준수한 미모를 가진 공방지휘자가 나타나 경기장을 주름잡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56년, 상해에서 경기가 끝난 뒤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인 하룡 원수가 그를 접견했다. 하룡 원수는 리광수 선생을 “튼튼하고 용맹하며 완강하고 훌륭한 돌파능력과 공격능력을 가진 중형 땅크!”라고 높이 치하했다. 이어 3년 뒤인 1959년, 제1회 전국운동대회에서 선생은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축구운동건장 칭호를 받음과 아울러 길림성축구팀의 일원으로 주은래 총리의 접견을 받게 되였다. 이때 하룡 원수가 주은래 총리에게 “이 선수는 길림성축구팀의 유명한 중형 땅크입니다.”고 선생을 특별 소개했고 그의 이름은 다시한번 만방에 알려지게 되였다.
1956년 제16회 올림픽대회 출전준비로 국가축구팀에 선발되여 주력선수로 한시기 활약하다가 다시 길림성축구팀에 돌아와 10여년간 줄곧 중앙공격수로 활약한 기간 길림성팀은 선생을 중견으로 한 독특한 전술풍격을 형성해 국내축구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키가 크고 몸집이 웅장한 선생은 중앙공격수로 늘 상대편의 방어진에 뛰여들어 수비진을 크게 휘저었는데 그때면 눈치가 빠르고 폭발력이 뛰여난 동료선수 손중천이거나 속도가 빠르고 ‘대포알슛’으로 이름있는 지청룡이 인차 그의 량편에 붙어 선생이 교묘하게 찔러주는 공을 득점으로 련결시키군 했다.
1958년, 전국갑급팀련맹경기에서 길림성축구팀은 4등의 영예를 따냈다. 그해 팀은 국가를 대표해 외국에 가서 친선경기를 치르게 되였다. 그번 방문시합에 길림성축구팀은 7전 4승 2무 1패의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때 선생은 유일한 우수선수로 선정돼 표창을 받았는데 외국신문들에 그의 사진과 함께 사적이 대대적으로 실리기도 했다.
1960년, 길림성 체육계를 대표해 영광스럽게도 전국문화교육계통군영회에 참가했던 선생은 같은 해 길림성축구팀을 따라 조선방문경기에 나서면서 또 조선축구계를 들썽했다. 당시 길림성축구팀은 조선에서 강팀으로 알려져있던 조선교통성축구팀을 5대1로 대승했는데 그번 경기에서 선생은 무려 4꼴이나 기록했던 것이다.
선생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길림성축구팀의 주장, 보조감독, 감독, 체육훈련판공실 부주임 등 직을 맡으며 자신의 재능을 남김없이 과시했다. 잔디밭에서 용맹을 떨치던 그가 체육행정사업에로의 리행을 준비하며 남다른 공헌을 예고하고 있을 때 길림성축구팀은 해산되였고 선생은 조직의 배치에 따라 훈춘으로 내려갔다.
1972년, 훈춘시체육운동위원회 주임으로 잠시 머물렀던 선생은 1973년, 길림성축구팀의 총감독을 거쳐 1975년, 연변대학에 몸을 담그게 된다.
선생은 연변대학에 가자마자 자신의 맡은바 사업에 정성을 몰부었다. 당시 비록 대학학력을 갖추지 못한 선생이였지만 다년간의 탐구와 실천경험은 그로 하여금 맡은바 대학교수 과제를 넘쳐 수행하게 했다. 선생은 1992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연변대학 체육학부 부주임, 주임직을 력임하면서 허준호, 방인권, 리호은, 주청렬, 김민영, 최영숙, 김복순, 박경희 등 1000여명에 달하는 체육인재들을 양성해냈다. 퇴직 이후에는 또 길림성축구협회 위원, 연변축구협회 부주석,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 부회장, 원 길림오동팀 고문, 연변로인축구협회 회장 및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축구사업을 위해 분투했다. 그런데 로년에도 그토록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며 어린 축구꿈나무들을 이끌어가던 선생은 2002년 6월 불행히도 뇌출혈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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