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9-10-30 14:21:01

우리들의 작은 생활력사를 펼쳐보면 음식물에도 가난이 덕지덕지 묻어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서민들의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 두부와 ‘콩질굼’, ‘콩지름’이라 하면 과장일가?
조선말대사전에 ‘콩질굼’은 함경북도 방언이라고 하고 ‘콩기림’은 황해남도 방언이라고 소개한다. 방언이 발달한 만큼 콩은 대단한 확장력을 가지고 두부와 콩기름, 콩나물로 탈피해서 초라한 우리들의 밥상질서를 지켰다. 그 시기 륙진방언에 익숙했던 시골사람들은 콩기름을 ‘콩지름’, 콩나물은 ‘콩질굼’ 혹은 ‘콩길굼’이라고 이름했는데 밥상에서 가장 맛이 있는 반찬이였다. 하지만 빠듯한 식량사정으로 끼니마다 먹는 반찬은 못되였다.
콩기름은 콩 탈곡이 끝나서 기름을 짜는 공사마을 ‘유빵(油坊)’으로 콩을 싣고 가서 몇백근씩 짜왔고 차제에 소여물로 콩 찌꺼기인 두병도 가져왔는데 기름 드럼통이 없었던 생산대에서는 콩기름은 보통 큰 독 몇개에 담아와서 인(人)당을 기준으로 나누어주었는데 대개 많아서 일년치로 인당 10여근 좌우였다. 그 당시 농촌사람들에게는 콩기름이 귀한 조미료로 인식되여 “푸세똥(마른소똥)도 콩기름에 닦아먹으면 맛이 있다.”고 했을 정도로 콩기름이 귀했다. 그 콩기름을 짜러 갈 때면 보조역으로 따라간 녀성들은 유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더워서 맨 속옷바람으로 일하는데 짜여나오는 기름 속에 땀이 들어갔고 변소도 가기 싫어서 오줌까지 싸대서 콩기름에 땀과 오줌이 섞여있다고 소문냈다. 그럴 리가 없었겠지만 시골사람들은 그걸 곧이듣는 모양새였다. “헤헤… 모르고 먹으면 보약이지.” 이렇게 위안했고 콩기름의 맛은 변할 줄 몰랐다. 필자가 살았던 마을은 량수 도자기공장과 가깝다 보니 쌀을 넣는 독으로부터 콩기름을 넣는 그릇까지 모두 항아리를 사용했는데 지어 소래 대신 ‘배떠리’라고 부르던 투박한 도자기그릇까지 사용했다. 식구들의 일년치 콩기름을 타오는 날부터 그냥 항아리에 보관했는데 지금의 생활기준으로 보면 류통기간을 무시한 것이였지만 그 시기 우리들은 류통기한이란 명사도 몰랐고 극상 해야 음식에서 밥이 쉬여 먹지 못한다는 간단한 상식만 알고 있었다.

지난 세기 70년대초쯤 우리 고향에 도자기공장 마을에서 하향한 지식청년 십여명이 내려왔다. 도자기공장과 우리 마을이 고작 10여리 상거한 거리라 콩이 나무에서 달린다고 해도 고개를 주억거렸을 상해하향지식청년들과 달리 영농상식도 대충 알고 있었고 하루 건너 부모 뵈러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듣기 좋게 도자기공장이라지만 공장에 가보면 찰진 황토를 이겨서 때리고 두드려서 모형 만들고 그것을 벽돌가마 같은 곳에 넣어서 굽는 공장이라 함마가 우루룽거리고 기계공학이 살아있는 공장과 달랐다. 하향지식청년들중에 조용하게 생긴 청년이 회계로 일하면서 그해의 콩기름을 회계가 책임지고 짜왔는데 불행하게도 금이 간 독에 기름을 담고 오다가 덜렁거리던 소수레의 진동으로 금이 실린 오지독이 길에서 그만 깨여져서 그 독에 담은 백여근 되는 기름이 길바닥에 다 새여나갔다. 사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저마다 아까워서 혀를 찼다. “명년에 콩기름 다 먹었다. 약한 다리에 침질이라더니…” 두덜거리면서도 행여나 해서 콩기름 비중이 물보다 가벼워서 물에 씻으면 콩기름이 우에 뜬다는 해괴한 소리를 해서 “그게 그렇게 되나?”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렇게 하자고 합의해서 이튿날 그 회계는 또래 청년을 이끌고 기름이 스며든 길바닥 흙과 모래를 괭이로 파서 수레에 가득 싣고 왔지만 정작 농민들에게는 그걸 다시 정제할 수 있는 공학이 전무했다. 콩기름이 가득 스며든 흙모래를 풀기 없이 내려다보며 한숨짓던 가난했던 사원들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청년이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 지금도 그 일을 잊지 못할 것이다.

콩나물은 보통 ‘콩길굼’, ‘콩질굼’이라고 불렀는데 관혼상제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반찬이였다. 콩나물을 너무 즐기던 어떤 나그네가 술상에 콩나물채가 오르지 않았다고 투정부리고 떠났다는 일화가 일었던 콩나물이였으니 콩나물의 몸값을 어림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 시기 혼사를 앞두고 시간을 맞추어 주인집 아낙네들은 이웃집이거나 손재간이 알뜰한 아낙네한테 부탁해서 콩나물을 기르게 했다. 콩나물을 기를 때면 콩기름을 비롯하여 온갖 기름들이 금물이였지만 콩나물의 성장을 방해할 기름들이 없었으니 콩나물은 말 그대로 우후죽순 같이 솟아나군 했다. 지금은 간혹 시장에 나온 콩나물을 보고 “오줌을 넣고 기른다오.”, “화학비료를 뿌리오.”라는 괴담들이 들리지만 그때의 콩나물들은 그야말로 오염 한점 없이 싱싱했다.
 간혹 겨울에 혼사집에 가서 술상에 오른 콩나물채가 식어서 맛이 없으면 주인집에 석유곤로를 요구해서 콩나물채, 고사리채에 마구 섞어서 그 시절의 음식메뉴에도 이름이 없던 ‘비빔잡채’를 끓이고 거기에 다시 고추장을 풀어 얼큰한 국물을 만들고 후후 불면서 술안주를 했는데 술상을 파할 무렵이면 나그네들은 “허허… 오늘 뜨거운 콩질굼채 국물이 시원해서 술맛이 좋았다.”고 게트림을 해대군 했다. 이런 ‘비빔잡채’를 ‘범벅’이라 했고 구덕이 없는 사람들은 야비하게 ‘개죽’이라고 폄하했다.
그때는 그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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