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9-07-25 09:01:53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으로 되돌아가보면 돈 한푼 안 받고 전문으로 머리를 깎아주던 리발소가 있었다. 그럴 리가? 아리비안나이트 같은 이야기라고 일축할 것 같지만 분명 내 고향에 있었다. 지금 보면 그 리발관은 지난 세기 60년대 중기 문화대혁명 전까지의 시기이다. 우리들은 흔히 ‘인민공사’시기를 습관적으로 ‘공사합작화’시기라고 칭한다. 리발소 뿐이 아니다. 그 후 한시기는 집체경제도 고려하지 않은 ‘농촌의료합작’제도도 출범하여 병을 보여도, 약을 사도 의료비도 납부하지 않았다. 그 제도가 몇년 반짝했다가 튼튼한 농촌경제 체력이 뒤받침하지 못해서 인차 페지되였지만 분명 그런 시기가 있었다.
“래일엔 머리 깎아라.” 잔걱정이 많았던 아버지의 령이 떨어지면 이튿날에는 어김없이 리발소로 갔다. 앞마당으로 지나간 전기줄에 앉은 제비들이 지지배배 울러대면서 활짝 열어  놓은 집안으로 둥지를 틀어 부지런히 날아들어오면 겨우 늦잠에서 깨여난 나는 가마목에 내몫으로 남겨놓은 밥을 대충 먹고 토성 안 마을에 있는 리발관으로 향한다. 동년시절에서 제일 감미로운 추억은 전기줄에 걸터앉은 제비들의 지저귐소리에 늦잠에서 깨여나 혼자서 밥먹던 생활 편린이다.
그 당시 리발소는 마을 한복판쯤에 자리잡은 규모가 큰 초가집이였다. 지금 보면 우리가 ‘고방’이라고 칭했던 아래방 구들을 걷어내고 리발소로 만든 것이였다. 보통 아래방은 출입문이 없고 정주로 통하게 되여있었지만 리발소는 동쪽벽에 출입문을 설계해서 그 문으로 드나들게 했다.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리발관(소)은 “시설을 갖추고 주로 남자들의 머리털을 깎아 다듬어주는 곳”이라고 해석되여있다. 지금 보면 초라했지만 국어사전의 해석 대로 작은 리발소 안에는 구닥다리 거울이 걸려있었고 그 거울 아래로 리발가위를 비릇한 초라한 시설과 기구들을 줄느런히 얹어두는 시렁도 있었다. 거기에서 가장 인상 깊은 기구는 낡아빠진 리발전문용 의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국제가 아닌 듯한 의자는 등받이에 누런 가죽을 덧대고 가녘을 멋지게 장식했는데 그 당시에 보면 보기 드물게 회전이 가능했고 높낮이를 임의로 조절할 수 있는, 어른스럽게 만든 팔걸이 의자였다. 진종일 그 회전의자에 앉아서 빙빙 돌았으면 하던 욕심은 우리 조무래기들의 공동한 바람이기도 했다. 어른들은 그 의자에 그대로 걸터앉으면 되였지만 우리 조무래기들은 의자팔걸이에 나무판대기를 가로놓고 그 우에 앉게 하고 머리를 깎아주군 했다.

간혹 늦게 가서 기다리고 있느라면 신문지로 도배한 천정을 멀거니 쳐다보면서 기다렸는데 지금도 생각나는 게 곡괭이를 휘두르며 거름산을 끄는 삽화다. 누렇게 퇴색한 신문지에는 청년의 까마귀 날개 같은 커다란 방한모 귀막이날개가 지금까지 건들거리는 것 같다. 그 삽화가 너무도 인상적이여서 ‘주덕해평전’ 집필시 연변일보사 자료실에서 연변일보 창간호로부터 1960년대 중기까지의 모든 신문을 슬그머니 뒤적거려보았는데 그 삽화가 <적비(积肥)생산을 촉진하자>라고 제목한 기사에 박은 삽화라는 걸 끝내 찾아냈다. 적비란 중국특정시기의 출범했던 생산자료 용어이다. 한마디로 두엄을 말하지만 두엄을 모으자로도 해석할 수 있다. 화학비료가 나오면서 이미 사어가 되여있지만 그 시기 노래가사에는 “적비로세… 적비로세… 거름산이… 량식이로다”라고 여차여차 생산을 촉진하자는 내용도 담겼다. 리발소가 생각나면 왜 이 삽화가 중뿔나게 끼여들면서 한줄에 꿰여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당시 우리들의 머리는 대부분 뒤골이 환히 드러나게 높게 깎았고 깎은 후에 리발원이 비누거품을 칠하고 다시 면도칼을 꺼내서 넓은 혁대 같은 물건를 펼치고 썩썩 갈았는데 리발원이 날이 선뜩한 면도칼을 들고 다가오면 겁나서 목을 잔뜩 움츠린다. “이 놈이 겁을 내긴, 니 군대 가기 다 틀렸어. 까딱 움직이지 말아라, 움직이면 큰일 나.” 늙은 리발원이 이런 으름장에 고스란히 있어야 했다. 그때 우리 마을 리발원은 동네사람들로부터 ‘하메옥’이라고 불린 분이셨는데 후에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이름은 아니고 하명옥이거나 하명욱이라고 짐작된다. 최월명이라는 좋은 이름도 ‘최월메’로 발음하던 6읍 출신들의 구음관습으로 미루어보면 꼭 하명욱이 ‘하메옥’으로 변음된 것이라고 정정하고 싶어진다. 동네 남자들의 머리를 책임졌던 리발소는 후에 팔에 벌건 완장 두른 청년들이 나타나면서 타의적으로 문을 닫았고 그리 넓지도 않은 리발소 앞마당은 밤마다 전등을 걸어놓고 마을간부들을 몇명 세워놓고 비판투쟁을 하는 곳으로 되여버렸다. 그 후부터 마을 청장년들도, 우리 조무래기들도 다시 그 리발소로 가지 못했다. 리발소가 페쇄되자 우리들은 머리깎이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머리깎기가 그리 어려운가… 손쉽게 달려들어다가 꼴불견을 만들었는데 우리들은 이런 엉망이 된 머리를 “개뜯어먹개머리” 혹은 “감지 가마치머리(감자누룽지)”라고 불렀다. 흔히 부모들이거나 형들이 아무런 반항 능력이 없는 자식들이거나 동생들을 상대해서 억지로 강행했는데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개뜯어먹개머리’를 만들어놓고 더 어쩔 방법이 없어 그 김에 “에라 모르겠다”고 아예 ‘꽝톨(光头)’로 만들어서 앙 울음을 터치게 했고 그 ‘뺀뺀골’이 부끄럽다고 등교도 거부하는 사태까지 빚군 했다. 필자도 그 시기에 동생들의 머리를 억지로 깎아서 ‘개뜯어먹개’로 만들군 했다. 그 시기 집집마다 리발가위가 없어서 동네에서 빌기도 했는데 이집저집에서 비는 빈도가 잦고 너무 오래 사용하다 보니 머리가위손잡이를 놀릴 때마다 ‘찍꺽찍꺽’ 잡음이 나면서 머리카락이 끼워서 아프다고 징징거리면 머리가위를 해체하고 밑에 종이를 몇벌 겹쳐서 받쳐넣고 가위 아래날과 웃날의 맞물림 정밀도를 높이군 했다. 그 시행착오를 겪으며 어느덧 머리를 잘 깎는다고 동네에서 소문나서 정부로 출근하기 전까지 우리 동네 청년들의 머리를 도맡아 깎아주는 역성을 부리군 했다. 지금도 작은 동네의 경우 리발관, 미용실이 따로 없어서 자체 해결이다. 큰 마을의 경우 리발관이 따로 없어 남자들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해결하지만 미용실은 원래 녀자들이 파마를 하거나 머리를 다듬는 곳이다. 그 미용실이 현재는 ‘헤어숍’, ‘헤어디자인실’ 등 낯선 간판으로 바꾸었다. 헤어는 머리 혹은 털이라는 영어이다. 리발관, 미용실보다 좀 더 세련되고 현대 도회적인 이미지가 풍기지만 다 직수입한 상호(商户)들이다. 연변의 도시 경우 헤어숍에 가서 헤어디자이너에게 머리를 맡기는 시대가 되였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정다웠던 리발관(소)들은 이제 흘러간 세월과 함께 멀리 가버렸다. 이제 도시의 거리에 리발관(소)란 상호가 걸리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하다.

사실 리발소의 리발원과 헤어디자인이 크게 구별되는 게 없다. 리발원은 남자 전문 봉사업이고 헤어디자인은 남녀구별이 없다고 해석하면 비슷할 것 같다. 인디안들이 처음으로 정수리에 칼 같은 갈기 머리를 한 신형의 모히칸머리형(莫西干发型)은 리발관에서 절대적으로 할 수 없고 헤어디자인만이 할 수 있다. 이런 것이 리발원과 헤어디자인의 구체적인 구별점이다.
이제 세월이 흘러 리발관은 점점 헤어숍이 대세다. 하지만 오래전의 그 리발소가 남아 지금까지 세월을 깎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개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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