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뮈의 《페스트》를 읽고
날짜 2020-06-30 09:40:51

― 카뮈의 《페스트》를 읽고

작가 카뮈는《이방인》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였다.《이방인》을 먼저 읽어서일가 그의 작품《페스트》도 어딘가 퇴페적이고 반항적이였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 작품은 1947년 출간된 해에 ‘비평가 상’을 수상했고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최대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카뮈도 이 작품으로 마흔네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페스트》를 깐깐히 다섯번은 읽었다. ‘비평가 상’에 걸맞게 이 작품에는 많은 비판이 있다. 정부에 대한 비판, 교회에 대한 비판, 인간에 대한 비판…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내 마음에 와닿는 건 사랑이였다. 나한테 페스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에 대한 호소였다.
카뮈가 태여난 이듬해인 1914년 8월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여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카뮈의 아버지는 알제리 원주민 보병으로 징용당해 프랑스 본토에 투입되였다가 그해 10월 전투에서 부상당해 사망한다. 이렇게 카뮈는 1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그 뒤로 어머니를 따라 외할머니의 집으로 이주한다. 카뮈는 자기 또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1차세계대전의 북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끊임없는 살인, 부정, 폭력 속에서 성장한다.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도 전쟁과 가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려 했다. 작품 속의 페스트는 전쟁의 내면화 과정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된 배경이였다. 페스트를 마감하는 사람들의 정서 역시 전쟁을 겪고 난 사람들이 겪는 기쁨과 고통, 회의, 환희와 많이 비슷하다.
̒페스트̓의 배경은 알제리 해안가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 오랑이다. 이야기는 4월 16일 시작한다. 페스트를 겪기 전 시민들은 일을 많이 한다. 하지만 그건 한결같이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에서 하는 일이였고 무엇보다도 장사에 관심이 있었다. 시간이 없고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한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페스트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할 때도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다. 페스트가 급속도로 퍼지자 오랑은 페쇄당하고 사람들은 생리별을 하게 된다. 식량보급은 제한되고 생활필수품은 륙로 또는 공로로 오랑에 제공되였다.
8월 중순에 접어들어 모든 것을 뒤덮어버린 페스트는 통계그라프의 꼭대기 평형선에서 요지부동으로 기승을 부리였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란폭해지고 감정이 메말라졌다. 10월이 되여 페스트는 도시 전체를 꿇어앉혔다. 사람들은 인간적인 체온에 열망하면서도 페스트라는 경계심 때문에 감히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고 있었다. 또 주민들 전체가 거침없는 향락을 추구하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물가가 상승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돈을 랑비하고 있었다. 매주 3000~40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매장하기 위해서는 위생직원과 무덤 파는 인부들이 많이 필요했다. 림시로 고용됐던 직원들이 페스트로 자꾸 죽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인력이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페스트가 도시 전체를 장악해버리고 나서 엄청난 실업자가 생겼고 그들은 막일에 대한 충원대상이 되였다. 전염의 위험성 정도에 따라 보수가 지불되였기 때문이다. 페스트는 오랑에 갇힌 모든 사람한테 닥쳐온 재앙이지만 그 재앙의 무게가 참 판이하게 달랐다. 죽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공포보다는 곤궁이 더 절박하지 않았을가… 12월말이 되자 사망자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2월이 되여 오랑의 대문이 열렸다. 어둑침침한 항구로부터 축하의 첫 불꽃이 솟아오르고 온 도시는 길고 은은한 함성으로 그 불꽃들을 반기고 있었다.
오랑의 시민들이 페스트를 이긴 것이 절대 아니였다. 그들은 단지 날씨의 변화로 인해 페스트를 보낸 것이였다. 이를 어찌 승리라 할 수 있을가?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리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 여겼지만 재앙은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였다. 왜냐하면 그 재앙의 흔적은 이미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았기 때문이다.
전쟁중에 도피하려는 사람이 있고 떼돈 벌려는 사람이 있고 투쟁하려는 사람이 있듯이 페스트라는 재앙에 대응하는 태도도 여러가지로 나타났다.
첫번째는 자기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니고 페스트가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도피적 태도’를 보이는 랑베르다. 랑베르는 신문사 기자로서 오랑에 아랍인들의 생활상황을 취재하러 잠시 머무는 처지였기에 사랑하는 애인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백방으로 방법을 모색한다.
두번째는 페스트가 사악한 인간들에 대한 신의 징벌임을 설교하며 재앙이 오히려 인간의 길을 제시한다고 ‘초월적 태도’를 보이는 파늘루 신부다. 그는 설교를 통해 인간이 죄를 지었기에 페스트라는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며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번째는 이 작품의 주된 태도인 ‘륜리적 반항’이다. 페스트와 싸우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보건대를 만드는 타루, 그 봉사대에서 묵묵히 사망자수를 통계하는 시청서기 조제프 그랑, 보건위원회를 설립하고 정부의 합당한 조치를 끌어내려고 애쓰고 페스트와 제일 정면에서 싸우는 의사 베르나유 리유이다.
여러 인물들중 베르나유 리유는 페스트의 서술자이면서 작가 카뮈의 대변인이기도 하다. 소설 처음부터 그는 오통과의 대화에서 “내게 관심있는 것은 꼭 한가지 뿐인데 그건 바로 마음의 평화를 얻는 일이랍니다.”고 고백한다.

마음의 평화에 대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도시가 봉쇄되고 정도는 다르나 오랑의 구석구석에서 사람마다 어떤 접촉과의 결합을 열망하면서 지냅니다. 그들 대부분은 곁에 있지 않은 사람을 향해서 뜨거운 체온과 애정을 달라고 웨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정이 끊어진 상태가 되여버렸음을, 더 이상 편지나 기차나 배 같은 평범한 수단을 통해서 남들과 어울릴 수가 없게 되였음을 괴롭게 여깁니다. 리유 역시 사람의 체온이 그리워 전염될 위험성을 무릅쓰고 붐비는 카페에 두번 들어갔다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런 감정들에 뭐라고 뚜렷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지만 그들에게 정말로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는 그 어떤 것과의 결합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고 그것을 달리 부를 말을 찾지 못해 그들은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습니다.”
페스트가 매주 3000~4000명의 사망자를 내였고 베르나유 리유는 하루 네시간밖에 자지 못하면서 환자들의 페스트로 인한 멍울을 자르고 격리시킨다. 하지만 그 많은 수고가 헛수고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환자들의 사망신고를 바로 이튿날 하는 일을 몇개월째 지속한다. 그러던 어느 하루 베르나유 리유는 타루에게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본 적 있느냐고 묻는다.
“사람이 과연 신 없이 성인이 될 수 있을가”라는 타루의 물음에 베르나유 리유는 “나는 성인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년대의식을 느낍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고 한다. 베르나유 리유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는 진리의 길을 걸어간다. 그것이 패배일지라도!
베르나유 리유는 재앙이 아무 리유없이 들이닥치는 것처럼 우리도 인간으로 태여났기에 인간다운 패배를, 인간다운 반응을 선택한다. 그리고 페스트를 겪으면서 인간이 가끔씩 손에 넣을 수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페스트가 확정되고 랑베르가 오랑을 떠나겠다고 할 때 베르나유 리유는 “당신은 이미 이 고장 사람입니다.”고 한다. 랑베르가 암거래상들을 통해 곧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베르나유 리유는 서두르라고 하며 “아마 나 역시 행복을 위해서 무엇이고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죠.”라고 한다.

이 작품에 진정한 승리자가 있다면 그는 랑베르가 아닌가 싶다. 작가는 조용한 미덕을 지닌 시청 서기 그랑을 영웅으로 지목하지만 분명 타루나, 베르나유 리유 혹은 그랑의 영웅주의보다 랑베르의 “행복에 대한 강한 욕구”를 앞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 속에는 많은 비판이 있는 반면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간다움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배여있다. 사랑과 고통과 귀양살이와 생리별 속에서 작가는 모든 인물들을 한덩어리로 만들고저 했고 매 인물을 한 인간으로서 인류 전체와 련결시키고자 했다.
페스트가 지나가고 공식적인 축하의 불꽃이 터질 때 작가는 한 로인의 입을 빌어 말한다.
“페스트란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인생이예요.”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이라면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무한을 중심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는중이다. 열흘 만에 전국 최대의 코로나전문병원이 공터에 세워졌고 가운을 벗으면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배우자인 이들이 감염되여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전투중이다.
사스와 메르스 등등 많은 바이러스를 이겨냈다 자부하지만 인류는 바이러스 앞에 한없이 약하다. 인류가 지구상에 700만년을 산 데 비해 바이러스는 34억년을 살았고 우리의 몸은 바이러스에 의해 변화되고 있다. 다음에 어떤 형태로 어떤 바이러스를 만날지 누가 알랴? 짐승을 우리에 가둬두고 잡아먹던 우리가 바이러스 덕분에 집에 갇힌 신세가 되였다. 하지만 바이러스 덕분에 가족애를 진하게 느끼고 자유의 가치를 깨닫고 이 사태에 마스크 가격을 인상하는 판매업자들을 같이 욕하면서 정직을 웨치고 전 국민이 한마음이 되여 평안한 봄날이 오기를 빈다. 이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는 ‘개인적 운명’을 초월하여 ‘집단적 력사사건’으로 변하고 우리는 집에만 있는 것으로 바이러스 전파를 차단하는 ‘반항’, 이 불가피하고 단일한 대응 방식으로 단결되였다.
지난 2003년 사스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중 가장 큰 교훈이라면 자연을 존중하라는 것이 아닐가 싶다. 결코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은 이들의 ‘맛보기’ 때문에 우리가 자체의 면역력으로는 이겨내기 힘든 바이러스와 만나 참 많은 이들이 죽었다. ‘지구의 경영인’으로 자부하는 인류가 언젠가 경영의 성적표를 제출해야 한다면 이렇게 겪는 시련과 과오 또 그 스스로의 잘못을 바로잡는중 진하게 그려지는 사랑과 헌신이 세세히 다 기록이 될 것이다.
인간이 진정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일가? 나는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하려는 것은 사랑에 대한 믿음과 행복에 대한 갈구라고 생각한다. 인간으로 태여났기에 인간만의 욕망과 고통,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가… 소설중 카뮈의 말을 빌린다면 “너도 이 고장 사람이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긍정과 응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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