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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2-12-20 17:22:54 조회

 
 
(전호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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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유(1910-1946)


강현여라고 불리기도 했다. 안휘성 륙안현에서 출생했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1년, 홍4군에 참가했으며 12사 34퇀에서 패장을 담임했다. 1934년, 군대를 따라 2만5000리 장정에 참가했다. 1937년 10월, 그가 소속된 부대는 팔로군 129사 385려 770퇀으로 개편되고 강현유가 제3영 교도원을 맡았으며 1939년에는 퇀공급처 부주임을 맡았다. 1944년, 그는 연안당위당학교에 가서 공부하게 되였다. 1945년 11월, 연안에서 간부대대에 편입되였다. 동북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그는 길동경비 2려 5퇀에 배치되여 퇀장을 맡았다. 1946년 2월, 길동경비 2려는 명령을 받고 돈화에서 토비숙청을 진행했으며 강현유는 돈화현 황니허구 대황툰 토비숙청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됐다.
 
1910년, 안휘성 륙안현에서 출생한 강현유는 일찍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싸우려는 뜻을 세웠다. 1930년, 홍군이 진가루(陈家楼)를 공격할 때 강현유는 ‘소년선봉대’의 기발을 높이 들고 선두에서 달렸으며 단원들을 이끌고 홍군을 협조해 완강한 반동세력 진지를 공격했다. 얼마 후 강현유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홍1군에 참가했다. 1931년, 홍1군은 홍15군과 함께 홍4군으로 통합편성되였다. 강현유는 모 부에서 패장을 맡았으며 부대와 함께 호북성, 하남성과 안휘성의 광활한 지역을 옮겨가며 싸웠다. 1934년, 홍군을 따라 장정에 나섰다.
1937년, 강현유가 소속한 부대는 팔로군 129사에 편입되고 강현유는 129사 385려 770퇀 제3영의 정치교도원을 맡았다. 1939년, 그는 퇀공급처 부주임으로 전근되였다. 당중앙의 대생산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1941년, 강현유는 감숙성 합수현에서 황무지개간 생산활동에 참가했다.
1944년, 강현유는 연안당위당학교에 가서 학습하게 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가 무조건항복을 하자 전국을 철저히 해방하기 위해 당중앙에서는 2만명 간부와 10만명 대군을 동북으로 파견했다. 1945년 11월, 강현유는 연안에서 간부대대에 편입되여 동북으로 진군하게 되였다. 그들은 몇달 동안의 대장정을 거쳐 당시 동북국 소재지인 매하구에 도착했으며 강현유는 25려에 배치받게 되였다. 1946년 1월, 25려는 길동에 가서 토비숙청을 하라는 임무를 맡게 되였으며 번호를 길동경비 2려로 바꾸고 강현유가 5퇀 퇀장을 맡게 되였다. 1946년 2월 15일, 부대는 조양진(지금의 휘남현성)에서 출발하여 화전을 지나 돈화로 향했다. 돈화는 장도(장춘-도문)철도의 요충지로서 길동지역의 정치, 경제, 군사 요충지였다.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토비들과 국민당선발대 그리고 일본괴뢰군 잔여세력들은 온갖 못된 짓을 일삼으며 중국공산당 간부와 혁명인사들을 미친 듯이 학살하고 인민의 생명에 위험을 주고 재산을 략탈했다. 2월 24일, 2려는 추위를 무릅쓰고 인적이 드문 신개령을 넘어 돈화 경내에 진입했다. 강현유는 돈화현 황니허구 대황툰 토비숙청전투에서 불행히 총탄을 맞고 36세의 나이에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1948년 3월, 중공돈화현위에서는 상급 비준을 받고 남황니허구를 현유구로 개명하고 대황툰을 현유툰으로 개명했다. 2008년, 현유진에서는 남산에 혁명렬사릉원을 수선했는데 기념탑을 재건하고 비문에 강현유와 그의 전우들의 업적을 새겼다. 또한 기념탑 뒤에는 강현유 렬사묘 및 대황툰전투에서 희생된 무명렬사묘를 건설했다. 현유진은 렬사의 이름으로 진, 촌의 이름을 명명하거나 비석을 세우고 릉원을 건설한외에도 2009년에 강현유가 희생한 지점에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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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장상(1905-1946)


손장유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산동성 몽음현에서 출생했으며 후에 연길현 로투구탄광에서 소년공으로 일했다. ‘9.18’사변 이후 항일구국군에 참가했다. 1934년, 손장상은 일부 구국군 인원을 이끌고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 참가하고 유격대대 3중대 중대장을 맡았다. 1937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 참모장 겸 제7퇀 퇀장을 맡았다. 1945년 10월, 손장상은 연변경비사령부 제2퇀 제2영 영장에 임명되였다. 1946년 1월, 손장상은 연길현 삼도만 평강촌 오품엽자구에서 토비들에게 살해되였다.
 
‘9.18’사변이 일어나기 전, 손장상은 빈곤한 가정생활 때문에 핍박에 못이겨 동북으로 오게 되였으며 연변 로투구의 개인탄광에서 소년공으로 일했다. 일본제국주의가 동북을 점령한 뒤 그는 결연히 탄광을 떠나 구국군에 참가했다. 1934년, 손장상은 수하 100여명을 이끌고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 참가했다. 그는 선후로 개편 이후의 유격대대 3중대 중대장, 동북항일련군 제2군 6사 참모장을 력임했다. 1937년 이른 봄, 6사 7퇀 퇀장이 전투중에 희생되자 손장상은 7퇀 퇀장을 겸임했다.
항일전쟁중에 손장상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용감하고 전투에 능한 지휘원으로 성장했다. 그는 여러차례 전투를 지휘했으며 4차례 부상을 입었다.
1945년, 손장상은 동북항일련군 교도려 연변파견대에 편입되여 9월에 연변에 도착했다. 10월, 중국공산당은 연변에 경비퇀을 조직했는데 손장상은 2퇀 2영 영장을 맡았으며 명월구 일대(원 연길현 관할구역)에 주둔하게 되였다. 성분이 비교적 복잡한 부대의 무장인원에 대해 손장상은 부대의 사상교양과 조직정돈을 진행함으로써 민족단결에 불리한 경향을 가진 동지들을 비판하고 부대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안정시켰으며 부대의 토비숙청 전투력을 일층 높였다.
경비영이 건립되기 전, 손장상은 삼도만에서 전부흥을 우두머리로 하는 평강 토비중대를 보안 제5중대로 개편하고 삼도만진 평강촌에 주둔하도록 했다. 하지만 전부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반역을 꾀하기 시작했다. 그는 암암리에 명월구 경비영내의 불견정분자 장영화, 설작량, 리준생 등과 결탁하여 력량을 그러모아 국민당에 빌붙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을 발견한 손장상은 직접 평강향(1945년 11월에 태평구 평강향으로 개명)에 가서 그들에게 인민의 적이 되지 말라고 설복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설복에 실패할 경우 무장해제를 실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기밀이 루설되고 매복해있던 전부흥의 부하들은 손상장과 전사들을 체포하여 그들을 따로 감금했다.
1946년 1월, 아군이 출병하여 삼도만을 공격했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발견한 전부흥은 심복들을 거느리고 황망히 도주하여 길림으로 가서 국민당 장백군에 들러붙었다. 도주하기 전에 그는 부하에게 손장상 등 9명의 혁명자들을 평강 북쪽에 있는 오품엽자구로 끌고 가서 살해할 것을 명령했다. 이후 명월구 경비영은 영장 손장상, 6련 지도원 김일준의 유체를 명월구 렬사비산에 이송하여 안장했으며 추도대회를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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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락권(1918-1946)


조선족, 원명 박락권(朴乐权), 조선 함경북도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19년, 가족을 따라 길림성 왕청현 배초구로 이주했다. 193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동북항일련군 제5군 2사 5퇀 2련의 련장,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 경위대 대장, 연변경비려 제1퇀 퇀장 등을 력임했다. 1946년 1월, 부대를 이끌고 토비숙청에 참가했다. 1946년 4월 18일, 부대를 이끌고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는 장춘의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들과 백병전을 벌이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1924년, 박락권의 부친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였다. 박락권의 어린 마음에는 아버지를 위해 원쑤를 갚아야겠다는 신념이 자리잡게 되였다. 1932년, 박락권은 아동단에 참가했다. 1934년, 공청단에 가입하고 같은 해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왕청유격대에 참가했다.
1935년, 박락권은 길동지역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에 파견되여 사업했다. 1936년,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같은 해 5군 교도대 반장을 맡았으며 이듬해 패장으로 승급했다. 1937년 7월, 그는 두명의 전사와 함께 목단강과 가목사 사이의 철도교량을 폭파시켜 한창 다리 우를 달리고 있던 적의 군용렬차가 강으로 추락함으로써 일본군에게 막중한 타격을 안겼다. 1938년 9월, 그는 동북항일련군 제5군 제2사 제5퇀 제2련 련장을 맡았다. 얼마 후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부 경위대 대장으로 전근되였다.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박락권은 동북항일련군을 따라 쏘련 경내로 철퇴하여 정돈과 훈련을 받았으며 동북항일련군 교도려 제4영 제7련에 편입되여 패장을 맡았다. 이 기간에 그는 긴장한 학습과 훈련외에 항일련군 소부대를 따라 중국 동북에 돌아와 각종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945년 9월 중순, 동북항일련군 교도려와 중공동북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박락권은 중공연변지역사업위원회 위원으로서 서기 강신태, 위원 최명석 등과 함께 연변에 진주하게 되였다. 10월말, 7000여명의 규모를 갖춘 연변경비려가 설립되고 산하에 3개 퇀을 두었으며 박락권이 제1퇀 퇀장을 맡았다. 그의 지휘하에 연변경비려 제1퇀은 점차 정치립장이 견정하고 규률이 엄격하며 군사기술이 강한 전투집단으로 발전했다.
당시 연길보안 제5중대 중대장 전부흥은 국민당 주력군대가 산해관 등 지역을 점령한 후 부하들을 이끌고 변절했으며 삼도만 등을 차지하여 토비소굴로 만들었다. 1946년 1월 27일, 박락권은 부대를 이끌고 포위공격을 진행했으며 그의 지휘하에 100여명의 완고한 토비들을 빠르게 섬멸했다. 이어 그는 제1퇀을 이끌고 형제부대와 협동작전을 펼쳐 안도현 토비두목인 단병의, 단병인과 그들의 수하 350여명을 생포했다. 이후 연변경비려 1퇀과 기타 형제부대들은 련합으로 왕청현 경내의 토비들을 숙청했다. 3월 14일, 길료군구의 장춘 공격 포치에 따라 연변경비려 1퇀은 장춘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박락권은 제1퇀을 이끌고 4월 13일 저녁에 장춘에서 약 10킬로메터 떨어진 동남외요참에 도착했다. 이어 그들은 동남종대에 편입되였으며 부대의 주요 공격임무를 맡게 되였다. 박락권은 부대를 이끌고 적들과 격렬한 백병전을 벌였으며 격전중에 중상을 입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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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부(1914-1946)


호북성 황안현(지금의 홍안현) 조림판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32년 4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35년 2월, 군대를 따라 2만5000리 장정에 참가했다. 1946년 2월, 길동경비 2려 참모장을 맡고 돈화 경내에서 토비숙청 투쟁을 전개했다. 1946년 4월, 동남종대 부사령원으로 임명되였다. 장춘 ‘4.14’전투에서 그는 직접 전선에 나가 지휘하고 영용하게 싸웠으며 남령, 위만신경공업대학(지금의 동북사범대학 길옆 붉은 벽돌 건물), 대륙과학원(지금의 장춘응용화학연구소 구관), 신경의과대학(지금의 동북사범대학) 등 곳을 함락시켰다. 4월 16일 정오, 그는 부대를 지휘하여 지금의 해방광장 서북쪽 ‘홍卍자회’를 포위하고 공략하던중에 총탄을 맞고 희생되였다.
 
1927년,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황안현을 점령했으며 오항부는 이때부터 혁명에 참가하여 소년선봉대 대장을 맡았다. 1929년 11월, 그는 공청단에 가입했으며 이듬해 4월, 홍1군에 참가했다. 얼마 후 홍1군은 홍15군과 통합편성되여 홍4군이 되였다. 1931년, 홍4군은 홍4방면군으로 확대편성되고 오항부가 패장을 맡았으며 호북, 하남, 안휘 유격구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오항부는 1932년 4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같은 해 10월, 홍4방면군은 국민당 제4차 ‘포위토벌’을 돌파했으며 천동으로 옮겨 전투를 계속했는데 그는 련의 지도원을 맡았다. 1933년, 홍군제1보병학교에 전근되여 련장을 맡았다. 1935년 4월, 홍4방면군은 장정에 올랐다. 1937년 봄, 홍군 서로군의 서정작전이 실패하자 대오에서 뒤떨어진 오항부는 홀로 심심산속에서 여러 달을 생활했다. 이후 9월, 란주에 도착했으며 팔로군 판사처에서는 그를 연안으로 보냈다. 연안에 도착한 후 오항부는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여 제3기 학생으로 공부하다가 졸업 후에는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2년 5월, 일본괴뢰군은 30만 대군을 출동시켜 태항산구에 대해 ‘대소탕’을 진행하고 ‘잠식’ 작전을 펼치려고 했다. 오항부는 400여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반‘잠식’투쟁에 맞설 대오를 조직했다. 그들은 보름 동안 4차례 전투를 펼쳐 효과적으로 적들의 ‘잠식’ 계획을 타격했다. 또한 적들에게 끌려온 민부 700여명을 해방시키고 군용 물품과 물자를 로획했다.
1945년 가을, 당중앙에서는 동북에 간부와 부대를 대거 파견하여 동북근거지를 건립하도록 했다. 오항부는 간부대대의 부대장을 맡고 부대를 이끌어 동북으로 진군했다. 동북에 이른 후 그는 길동군구 경비 2려 참모장을 맡고 려장 등극명을 협조하여 2려를 이끌고 연변지역에서 일본괴뢰군 탄약창고를 접수하고 지방치안을 유지하며 토비숙청을 하는 등 세가지 임무를 집행했다. 1946년 2월, 오항부는 상급의 지시에 따라 부대를 이끌고 돈화로 향하여 토비숙청에 참가했다. 오항부와 2려 장병들은 추위와 무기탄약이 부족한 등 수많은 곤난을 극복하며 보름이 넘는 간고한 전투 끝에 돈화 경내의 토비들을 모두 숙청했다.
3월 중순, 동북민주련군 총부는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쏘련군이 철퇴한 후 장춘을 탈취하기로 결정했다. 4월 상순, 길료군구에서는 2만여명의 병력을 장춘 외곽에 집결시켰다. 그들은 진공 방향에 따라 서남, 동북, 동남 세갈래 종대로 나누고 오항부가 동남종대 부사령원을 맡았다. 4월 14일, 각 종대는 장춘을 향해 진공을 발동했다. 15일 새벽 5시경, 장춘을 공격하는 전투가 시작되였다. 세갈래의 종대는 동시에 시구역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며 오항부는 최전방에 나아가 부대를 지휘하여 남령, 신경공업대학 등 여러 곳을 련속 함락시켰다. 전투중 오항부는 총탄을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다음기 계속)
박진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
작가:박진화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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