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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날짜 2022-01-18 10:08:20 조회


(전호 이음)

18
량성룡
(1906-1935)


조선족, 량병진이라고도 하며 길림성 왕청현 대황구(오늘의 대흥구진) 하서촌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했다. 193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1932년 11월, 왕청반일유격대를 설립하고 대대장을 맡았다. 1935년, 라자구에서 요영구로 량식을 운송하던 도중 계관라자에서 적들과 마주쳐 전투 속에서 불행히 총에 맞아 희생되였다.
량성룡은 9살 때 학당에서 공부했다. 1927년, 그는 적극적으로 혁명투쟁에 참가하고 1929년에 대황구 하서촌에서 아동단을 조직했다. 1930년 늦여름,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9월, 당조직은 량성룡을 중공라자구위에 파견, 10월, 당의 령도하에 12명의 대원을 보유한 라자구유격대가 설립됐다. 얼마 후, 이를 토대로 왕청현로농유격대가 건립되고 량성룡이 대장을 맡았다. 이 대오는 대황구, 소황구, 요영구 일대에서 보안단을 습격하고 친일분자를 타격했다. 12월, 적들보다 력량이 약한 정황에서 중공왕청현위 군사부는 유격대에 겨울철에는 매복하고 인원을 분산시켜 겨울을 보낸 후 봄부터 다시 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부대장 림세운 등 사람들이 이를 어기고 40여자루의 총을 지하 또는 나무동굴에 숨긴 후 40여명을 거느리고 쏘련으로 갔다. 이로 인해 무기들이 전부 적들에게 빼앗겼다. 유격대는 하는 수 없이 해산했다.
1932년 1월초, 중공왕청현위는 반일유격대를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현위 군사부는 2개월의 군사학습반을 조직하고 량성룡, 김철 등 골간들을 양성했다. 정월대보름날, 량성룡 등 유격대원들은 구국군으로 위장한 후 나무방망이와 칼을 들고 대감자위경찰분주재소를 습격, 7자루의 보총과 수백발 탄알을 로획했다.
그해 3월, 왕청현반일유격대가 정식으로 재건되였다. 유격대의 무장력량을 장대시키기 위해 량성룡은 한개 소대를 거느리고 소왕청의 위보안단 영지를 습격하고 5자루 보총과 수천발 탄알을 로획했다. 그해 6월, 왕청현당위 기관이 소왕청 마촌에 옮겨간 후 그는 부대를 거느리고 대두천을 습격, 위자위단장 오상령을 제거한 후 많은 군수품을 로획했다. 그해 9월초, 현당위 군사부는 량성룡을 왕청현유격대 대장으로 임명했다. 9월말, 왕청현당위는 유격대를 5구에 파견, 구당위를 협조해 반‘토벌’전쟁을 전개, 기간 량성룡은 적들의 ‘토벌’을 반격하는 동시에 주동적으로 출격해 석현 일본위경찰서와 석현, 영창동, 류채 위자위단을 습격했다. 그해 11월, 왕청현유격대는 반일유격대대로 확충, 산하에 3개 중대를 설치하고 량성룡이 대대장을 맡았다. 얼마 후, 그는 가야하로부터 중공동만특위, 중공왕청현위 주둔지 소왕청 마촌으로 돌아가 계속해 전 현의 반‘토벌’전역을 지휘했다.
1933년 4월초, 일본침략자들은 날로 강대해지고 있는 항일무장을 진압하기 위해 왕청경내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괴뢰경찰 1500여명을 소집해 ‘초토’작전을 빌미로 소왕청유격근거지에서 ‘토벌’을 진행했다. 4월 17일과 18일 두날 동안 적들이 전면 진공을 발동했고 유격대는 확정한 전술에 따라 량성룡의 지휘하에 200여명 일본괴뢰군을 소멸하고 4대의 차량을 격파했다. 그해 5월, 왕청현유격대대는 량성룡의 령도하에 대감자를 습격하고 6월에는 배초구 괴뢰군 병영을 습격했으며 7월에는 쌍하진전역을 진행, 대두천, 석현 위자위단을 습격했다. 8월, 그들은 또 십리평전역과 요영자매복전을 펼쳤는데 매차례 전역에서 모두 승리를 거둠으로써 일본침략자들에게 엄중한 타격을 주었다. 그해 9월, 그는 왕청현유격대대를 거느리고 구국군 총사령대리 오의성이 지휘하는 동녕현성공략전역에 참가했다. 이번 전역은 비록 현성을 공략하지 못했지만 150여명 일본괴뢰군을 섬멸하고 대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1933년 12월, 적들의 엄밀한 봉쇄와 미친 듯한 ‘토벌’의 불리한 형세에서 근거지의 식량이 엄중히 부족했다. 량성룡은 자진해 식량을 모으는 사업에 뛰여들었다. 그는 혼자 말 두마리를 몰고 훈춘현 량수천자 북대동, 고려령 일대에 가 소금을 구매한 후 라자구에 가 식량으로 바꾸었다. 1935년 1월초, 라자구에서 식량을 싣고 요영구항일유격근거지로 돌아갈 때 량성룡은 계관라자 부근에서 적들의 ‘토벌대’와 마주쳤고 격전 속에서 불행하게도 총에 맞아 희생되였다.

19
박동근
(1904-1935)


조선족, 본명은 박동화, 조선 함경북도에서 출생했다. 1920년, 길림성 연길현 의란구로 이주하고 1930년 가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년, 연길현반제동맹 서기로 임명됐다. 1932년초, 의란구유격대를 설립하고 대장을 맡았다. 1933년 1월, 연길현반일유격대 대대장으로 되였다. 그는 선후로 개산툰위순경국, 횡도자위자위단, 삼도만위경찰서를 공격하는 전역과 왕우구항일근거지 보위전역을 지휘했다. 1934년 6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 퇀장으로 임명됐다.
1920년, 일본제국주의의 잔혹한 식민통치로 인해 박동근은 아버지를 따라 조선에서 길림성 연길현 의란구로 이주했다. 중국에 온 후 그는 야간학교를 꾸려 촌의 청소년들에게 과학문화 지식을 전수하고 광범한 군중들 속에서 항일사상을 선전했다. 1930년, 야간학교 학생들은 그의 호소하에 대부분이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붉은 5월 투쟁’에 참가하고 투쟁의 골간으로 성장했다. 그해 하반년, 박동근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1년, 중공연길현위 지시에 따라 박동근은 의란구농민협회, 반제동맹, 호제회 등 군중단체를 정돈하고 연길현반제동맹 서기로 되였다.
1932년초, 중공연길현위의 포치에 따라 박동근은 의란구유격대를 건립하고 대장을 맡았다. 그해 여름, 그는 대원들을 거느리고 개산툰위순경국, 횡도하자위자위단 그리고 연길 주변의 일부 친일지주 장원, 해란구괴뢰군 등을 교묘하게 습격, 46자루의 총과 대량의 탄알을 탈취했다. 그해 9월의 어느 날, 그는 최현 등 유격대원들과 함께 임무를 집행하는 도중 세린하 소북동에서 지형을 관할하는 3명의 일본헌병을 발견했다. 박동근은 련속 총 3발을 쏘아 일본헌병을 단번에 격살했다. 박동근의 ‘명사수’ 별명도 연길현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1933년 1월, 연길현 각 지역의 유격대들이 합병하여 연길현반일유격대대가 설립되였고 박동근이 대대장을 맡았다. 그해 여름, 유격대대는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에 주둔하게 되였다. 항일유격대대가 발전, 장대해짐에 따라 삼도만에 위치한 위경찰서가 유격대 발전을 저애하는 장애물로 되였다. 이 경찰서에는 도합 100여명 괴뢰경찰이 있었는데 무기장비가 훌륭했다. 박동근은 유격대를 거느리고 선후로 23차례나 위경찰서를 공략, 50여명 적들을 죽였지만 유격대대는 한명의 사상자도 없었다. 유격대대의 경비가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정씨 성을 가진 대원과 함께 조만량식무역주식회사 주인 남부일 일행으로 위장해 룡정가(지금의 룡정시구역)에 위치한 ‘간도’대상점 주인 남군필의 집을 찾았다. 박동근은 총을 남군필에게 겨누면서 “일본놈들에게 빌붙어 번 돈을 일본놈을 물리치는 군대경비로 사용할 테니 빨리 내놓아라!”로 으름장을 놓았다. 남군필은 하는 수 없이 10만원을 박동근에게 주었다.
1934년 봄,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건립됐고 박동근이 제1퇀 퇀장으로 임명됐다. 1935년 1월, 박동근은 불행히 사망했다.

20
리민환
(1913-1936)


조선족, 함경북도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고 어릴 때 부모를 따라 길림성 연길현으로 이주했다. 1928년, 룡정대성중학에서 공청단에 가입하고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9.18’사변 후, 당조직은 그를 류하현에 파견했다. 1933년, 그는 류하현 청년의용군을 설립하고 지도원을 맡았다. 1935년, 그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 참모장으로 임명됐다. 1936년 7월 15일, 리민환은 부대를 거느리고 본계 마천령 대유수구에서 일본군과 격전중에 총을 맞고 불행히 희생됐다. (2015년, 민정부에서 공포한 제2패 600명 저명한 항일영렬과 영웅군체 명록에 수록)
리민환은 부모를 따라 길림성 연길현으로 이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모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28년, 그는 룡정대성중학에서 공청단에 가입하고 료녕성 청원현에서 혁명활동을 진행했다. 1930년, 리민환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공청단청원현위 서기로 임명됐다.
1931년 ‘9.18’사변 후, 당조직은 리민환을 류하현에 파견, 삼원포일대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그는 한패의 항일열정이 드높은 청년들을 단결해 1933년 봄, 류하청년의용군을 설립하고 지도원을 맡았다. 그해 말, 류하청년의용군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에 가입 후 직속 소년련으로 개편됐으며 리민환이 정치위원을 맡았다. 소년련의 전사들은 대부분이 16세 좌우의 청소년이였고 무기가 부족했다. 1934년 봄, 그는 10여명 전사들을 거느리고 농민으로 위장한 후 류하로부터 삼원리로 향하는 ‘국도’를 보수하는 일에 참가, 괴뢰경찰들을 죽이고 10여자루의 총과 1000여발의 탄알을 로획했다. 1934년 가을, 작목대전역에서 소년련은 대지주를 생포해 2자루 모제르총(匣枪), 12자루 소총과 1500발 탄알을 얻어냈다. 1934년 겨울, 소년련은 림강에서 통화로 왔다. 그들이 이밀에 이르렀을 때 삼원포에 주둔해있던 괴뢰군 소본량 부대 제2영에게 미행을 당했다. 적들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그는 일부 전사들이 계속 전진해 유리한 지형을 점령하고 다른 전사들은 4명을 한조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원형으로 앉아 눈덩이처럼 보이도록 양털옷을 거꾸로 입는 작전을 짰다. 적들이 발자국을 따라 바싹 추격하다가 급격히 줄어든 발자국을 발견하고 주춤하는 사이 전사들은 일제히 적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몇명만 달아나고 적들 대부분은 사상됐다. 소년련은 수십자루의 보총, 작은 포와 일부 식량을 로획했다. 1935년, 리민환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 참모장으로 임명됐다. 그해 3월, 리민환은 위통화현 현장 서위유와 일본의 한 지도관이 봉천에서 통화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한 후 인차 사장 리홍광에게 보고하고 매복전을 펼쳐 서위유, 일본지도관과 10여자루의 총을 로획했다.
1936년, 일본군은 대량의 병력을 끌어모아 미친 듯이 남만항일유격구를 공격했다. 항일련군의 고군분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일련군 1군은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료양, 수암과 해성 3개 현의 변경지역을 통해 중장철도를 뛰여넘고 료하를 건너 료서와 열하 지역에 진입해 관내의 홍군과 직접 련계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6월 28일, 리민환은 군정치부 주임 송철암, 1사 사장 정빈(후에 변절)과 함께 1사 사부, 경위련, 소년영, 3퇀 총 400여명을 거느리고 료녕 본계현의 화상모자에서 출발해 료서, 열하로 향하는 원정길에 올랐다. 이로써 동북항일련군 제1군의 력사상 첫 서부원정이 시작됐다. 목표가 폭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대는 산령을 넘어 우회하면서 전진했고 사와구, 대동구를 거쳐 그날 밤에 초하구 역전을 점령했다. 7월 초, 부대는 료양, 수암, 해성 3개 현의 변계지역에 도착했다. 이때 적들은 수많은 병력을 소집해 항일련군부대를 포위하려고 시도했다. 리민환 등은 연구를 한 후 과감히 사동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8일, 부대는 세갈래로 나누어 항인로유격구로 향했다. 15일, 리민환은 부대를 거느리고 본계 마천령 대유수구에서 매복해 뒤따라오는 적들을 소멸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일부 전사들을 파견해 산꼭대기에 올라가 산 아래로 내려가는 발자국을 내고 산 뒤켠의 절벽을 통해 산으로 톺아오른 후 길 량켠의 수림에 매복하도록 했다. 부대가 매복하자마자 련산관에 주둔해있던 이마다(今田) 대장이 거느리는 일본수비대 제2중대가 인차 뒤따라왔다. 이마다는 망원경으로 산 아래에서 상황을 살피다가 매복한 리민환에게 단번에 사살됐다. 이어 항일련군 전사들이 산꼭대기에서 일본군에게 불벼락을 가했고 30여명 일본군인을 사살했다. 그날 오후, 일본군은 또다시 병력을 집중해 항일련군부대를 겹겹이 포위했고 리민환은 부대를 거느리고 적들과 치렬한 전투를 벌이다가 총에 맞아 불행하게도 희생되였다.    
(다음기 계속)
장설화 편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사명》에서 발췌
작가: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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