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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간 그라운드 안팎을 종횡무진

-장경화 감독의 ‘축생축사’ 인생
날짜 2021-12-09 10:56:38 조회


올해 51세인 장경화는 34년간 그라운드 안팎을 종횡무진하면서 뛰고 또 뛰였다. 34살 전까지 17년간 ‘그라운드 안’에서 선수의 신분으로 팀의 영예와 승리를 위해 뛰였다면 그 뒤의 17년간은 감독이자 교원의 신분으로 ‘그라운드 밖’에서 꿈을 좇는 아이들의 키잡이로 뛰고 있다.
“제 꿈이요? 아이들의 꿈이 제 꿈이죠.”
그제날 꿈을 좇던 그 소년, 이제는 아이들의 꿈을 이루어주는 것이 축구인생 유일한 목표라고 말한다. 2017년, 장경화 감독은 조선족 유일의 체육분야 대표로 성 11차 당대회에 참가하는 영광도 지녔다…

프로축구 선수로 뛰였던 17년
1994년, 갑A리그가 정식으로 시작됐다. ‘축구의 고향’이라 불리우던 연변에도 학교마다 축구팀이 있을 정도로 세찬 축구열풍이 불어왔다. 연변팀의 경기가 있을 때면 연길시인민경기장은 빈자리 하나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심지어 경기장내에 진입하지 못한 축구팬들은 경기장 밖에 있는 나무에까지 기여올라 구경할 정도였다.
박태하 감독이 연변팀을 이끌고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면 최은택 감독이 이끌었던 당시 연변팀은 기적 같은 첫 전성기를 열었다. 변강 소도시에 불어온 축구열기는 그야말로 중앙의 매체에까지 보도될 만큼 어마어마했다.
골수팬이 아니더라도 그 시절 연변에서 생활했던 사람이라면 연변팀 선수 이름을 줄줄이 말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시절 연변오동팀과 경기장에서 날파람을 일구던 축구선수들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가슴 뛰였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들중에서도 상대팀 공격수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어 ‘무쇠방패’라는 별명까지 얻은 축구선수가 있었다. 바로 연변팀의 수비수 장경화 선수였다. 그의 수비력은 당시 국내에서 내노라 하는 공격수들에게 ‘공포의 접착제’ 같은 존재였다. 당시 국가팀 제1공격수인 학해동도 장경화의 수비 만큼은 뚫기 어려워했다. 경기마다 사납게 덮쳐들어 상대방의 진공 루트를 적시적으로 차단하고 이악스레 공을 빼앗는 면에서 장경화는 항상 검질기고 완강한 모습을 보여주어 축구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71년, 장경화는 화룡현의 한 보통 로동자가정에서 3남매중 맏아들로 태여났다. 1979년에 부모를 따라 연길로 이사와 연길시건공소학교에 다니게 되였다. 시간만 나면 친구들과 함께 축구공을 차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체육선생님은 그의 남다른 반응속도와 훌륭한 체능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학교축구팀에 영입했다. 선생님은 그의 특장과 재능에 알맞은 포지션을 정해주고 방어기술을 전수했다. 그것은 후날 장경화가 우수한 수비수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된 첫 스타트였다.
1986년, 장경화는 연길시제2고급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미 소학교부터 시작해 초중까지 탄탄한 실력을 쌓아온 장경화는 학교에 축구팀이 있다는 소식을 접한 후 곧바로 체육교연실의 축구지도교원이였던 남인수 선생님을 찾아가 학교축구팀에서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남인수 선생님은 장경화의 남다른 속도와 체력을 높이 긍정하면서 흔쾌히 받아주었다.
1987년 여름, ‘전 주 중점고급중학교 축구경기’가 있었다. 장경화는 연길시제2고급중학교 축구팀 주력선수로 경기에 출전해 맡겨진 수비임무를 착실히 잘 완수했다. 남다른 민첩함, 지치지 않는 체력, 거기에 포기를 모르는 완강한 의력까지… 대인방어와 공 쟁탈에서 장경화는 특출한 개인력을 뽐냈다. 바로 그날, 후비선수 선발을 목적으로 경기장을 찾았던 길림성청년팀의 동경춘, 리호은 두 코치가 장경화를 재목으로 점찍고 러브콜을 보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살이였다.
장경화는 길림성청년팀의 정식 선수로 되였다. 하지만 성급팀에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기타 선수들 사이에서 속도와 체력을 빼고는 실력, 경험 어느 하나 내세울 것 없었던 ‘촌티’나는 선수였다. 팀에 합류한 지 4년 철을 잡는 1990년까지도 늘 차가운 벤치를 지키는 후보선수에 불과했다.

1993년, 길림성 대표해 제7회 전국운동회에 참가.

빠르기만 한 선수를 넘어 실력을 갖춘 선수로 되기 위한 그의 노력이 시작됐다. 수비 특히 대인방어는 말 그대로 밀리지 않는 몸싸움과 적극성, 책임감이 요구된다. 그렇다 보니 훈련과 경기를 거듭하면서 상처가 생기고 부상을 입는 일이 기수부지였다. 하지만 팀 훈련외에도 호된 개별훈련을 통해 흘린 땀의 량이 곧 주력선수와 후보선수를 결정짓는 청우계가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인내와 구슬땀은 헛되지 않았다. 장경화는 1991년부터 팀에서 점차 립지를 넓혀가더니 드디여 길림성청년팀의 주력선수로 출전할 수 있었다. 같은 해, 장경화는 길림성2팀의 주력선수로 전국 축구을급리그에 참가했다. 탄탄한 기술력과 완강한 수비력으로 년말에는 길림성1팀의 정식 선수로 선발되는 행운까지 얻었다. 그리고 주력선수로 길림성팀을 대표해 제7차 전국운동대회에 출전, 단체 5등이라는 영예를 따냈다.
장경화가 성숙된 축구스타의 기량을 뿜기 시작한 것은 ‘97’ 갑A리그 경기부터였다. 그해 제6라운드부터 물오른 경기력으로 팀의 주력 수비수로 뛰기 시작한 장경화는 황경량과 멋진 배합으로 경기마다 상대 공격의 예봉을 꺾어놓았다. 장경화는 연변팀이 련속 아홉껨의 불패신화를 창조하고 갑A리그 4강이라는 최종성적을 따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연변팀이 전국에 위훈을 떨치고 연변축구팬들이 환락의 도가니에 빠지는 데 한몫을 톡톡히 담당했다.
축구에서 수비가 강해야 팀이 강해진다는 것은 정석이며 곧 진리라고 여겨진다. 당시 연변오동팀은 강한 수비력을 갖춘 팀으로 대련만달, 상해신화 등 내노라 하는 강팀들과 대적해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강하게 맞서 싸워 한때는 갑A련맹에서 ‘거물사냥군’, ‘강팀킬러’, ‘다크호스’ 등 별명도 붙여졌다.

축구인재 양성에 몸 담은 17년
2000년, 신로교체가 되면서 연변팀내에는 당원이 없었다. 축구팀에 선봉으로 인솔역할을 할 적임자를 확정하고 장경화를 비롯한 3명 주력선수를 당원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해 극심한 자금난을 겪었던 연변팀은 갑B리그로 강등하고 팀마저 절강록성에 팔려갔다. 장경화 역시 팀을 따라 절강에 갔고 산 설고 물 선 타향객지를 돌다가 연변축구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지닌 채 고향에 돌아왔다.
2004년부터 장경화는 청소년 축구인재 양성 사업에 뛰여들었다. 연변체육운동학교에서 사업하다가 2009년에는 연변팀의 보조코치로 잠간 일하기도 했다. 그동안 장경화 감독은 여러 유망주들을 발굴하고 키워 중국 프로축구 정상급 반렬에 올려놓았다. 대표적인 선수로는 당면 큰 기량을 펼치고 있는 김경도, 남송 등 선수들이다.
2016년, 장경화는 한국행을 결정하고 1년간 한국에서 현대적 축구리념을 체계적으로 학습했다. 주말이면 한국 각 대학교의 축구경기를 찾아다니면서 선진적인 훈련방식과 경기기술을 배웠다. 그 후 귀국해 중국 축구감독원 A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연변체육운동학교에서 2006년생 축구꿈나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부모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들이다 보니 처음 경험해보는 숙소생활에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런 아이들을 상대로 기술력, 경기력, 협심력 나아가 생활력까지 가르쳐야 했다. 그들과 24시간 맞대고 있다 보니 낮에는 아이들의 감독이자 선생님이였고 저녁에는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였다. “학교 밖 불량음식 사먹지 말라.”,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어라.”, “이불은 반듯하게 개여라.”, “벗은 옷은 가지런히 놓아라.”… 부모 대신의 ‘잔소리’는 전부 감독인 장경화의 몫이였다. 과묵하고 말이 없던 그를 ‘다사스러운’ 사람으로 만든 것은 바로 감독이라는 신분이 얹혀진 교원의 책임감이였다. 안해마저 말수가 많아진 장경화 감독의 변화에 롱담조로 “벙어리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라고 할 정도였다.
“선수들은 늘 가족을 떠나 타지에서 홀로 생활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생활력을 가르치는 것이 우선이지요.”
경기마다 가지런히 줄지어 걸려있는 아이들의 경기복을 보면 흐뭇해진다는 장경화 감독은 상대팀 감독의 칭찬도 받았다면서 자랑스러워했다.
“체육학교를 다닌 후로 나쁜 습관들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아이가 된 것 같습니다.”
김건우 학생의 아버지는 감독이 아이에게 전수한 것이 단순 축구기술 뿐만이 아니란다. 주말 집에 와서도 옷을 벗어 정연하게 개여놓는 것은 물론이고 속옷, 양말들은 제때에 빨아놓는 좋은 습관도 생겼다면서 그 변화에 기뻐했다.
사시장철 훈련이 지속되다 보니 명절이나 생일은 물론이고 음력설까지도 애들과 함께 동고동락했다. 장천일 학생은 “선생님은 설이면 우리들에게 세배돈도 나눠줍니다. 또 부모님한테도 하지 않는 고민을 선생님한테 털어놓으면 감독님은 함께 고민해주십니다.”고 하면서 ‘보호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속마음을 터놓았다.
수없이 많은 경기를 통해 경험을 쌓아야만이 실력이 빨리 향상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장경화 감독은 기회만 되면 주내 고중, 대학교 등 교정축구팀들과의 시합을 조직한다.
“아이들중에서도 기술이 출중한 아이는 개인플레이에 익숙해져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쳐주기 위해서 많은 설명을 해주지만 잘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축구는 아무리 유능한 선수라도 혼자서 풀어갈 수 없는 운동이기에 기타 선수들과의 협력에 의지해야만 능력이 한결 돋보인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래서 훈련, 경기가 없는 여가시간 혹은 저녁시간을 리용해 아이들과 함께 핸드폰을 내려놓고 모여앉아 동영상을 보면서 경기분석을 한다. 아직은 프로선수가 아니라 부족하지만 부단한 경기를 통해 협동정신을 배우고 팀 선수들간의 호흡을 맞추면서 기술력을 제고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중이란다.
2017년, 장경화 감독은 길림성 11차 당대회 토론석상에서 연변의 청소년 축구선수 양성과 교정축구의 정황을 회보하면서 “다년간 연변은 청소년축구의 발전을 위해 물심량면으로 지지해왔고 현재 U-18팀부터 U-12팀까지 각 년령단계 축구꿈나무들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땀동이를 쏟고 있습니다.”고 소개했다.

“연변팀이 중국 축구무대에서 완강한 작풍과 경기풍격으로 주목받고 연변의 축구선수들이 지금도 중국 축구무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것이 단지 축구가 아니라 연변축구의 정신인 것 같습니다.”
장경화는 감독으로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연변의 축구정신, 연변의 축구열정이라고 말한다. 또 교원으로서 가르쳐야 할 것은 옳바른 가치관과 바른 생활습관, 공동체의식 나아가 축구와 세상을 대하는 태도라 말한다.
“축구라 하면 프로축구 선수만이 길이라고 여기는데 이는 너무 협소한 생각입니다. 이를테면 감독, 심판, 교원과 행정일군 등 축구와 관련된 다양한 역할이 많고도 많습니다. 아이들이 전부가 프로축구 선수가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장경화는 늘 아이들의 진로를 걱정하면서 그들에게 좁은 시각이 아닌 열린 사유로 미래를 바라볼 것을 조언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선수일 때 뛰던 것 만큼 보람차고 신납니다.”
축구에 살고 축구에 목숨을 거는 ‘축생축사’ 장경화 감독, 축구선수의 꿈을 꾸는 아이들이 축구를 포기하지 않고 축구 관련 전문가로 성장해 축구사랑을 이어갈 수 있도록 경험과 노하우를 남김없이 전수하는 것이 그의 소박한 목표이다.   

(필자는  연변일보사 기자)
작가:장설화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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