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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련군정신 영원하리


날짜 2020-08-24 14:46:29 조회


길림성은 동북항일련군 주요 활동지역중의 한곳이다. 동북항일련군의 영웅사적은 우리들에게 곤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혁명을 끝까지 견지하라는 고귀한 정신을 남겨주었다.
“아무리 멀리 걸어왔어도 지나온 길을 잊으면 안된다.” 본지는 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쑈전쟁 승리 75돐에 즈음해 양정우, 왕덕태, 리홍광, 진한장, 동장영 등 렬사들의 릉원 등 홍색력사 자원을 찾아보았다.

 ― 편집자

양정우 장군

양정우는 1905년 2월, 하남성 확산현 리만촌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23년, 하남성립제1공업학교에 입학하였고 재학기간 그는 비밀리에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1925년, 양정우는 ‘5.30’ 반제애국운동에 적극 뛰여들었고 1926년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중국공산당조직의 파견을 받아 개봉으로부터 확산으로 돌아가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초, 확산현농민협회 회원은 1만여명으로 발전하였고 양정우는 확산현농민협회 위원장으로 선거되였다. 그해 4월, 양정우는 확산 수만명의 농민들을 령도하여 폭동을 일으키며 군벌 무장력량을 쫓아내고 확산현성을 공략했다. 1927년 5월 양정우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8.7’ 회의 후 양정우는 류점추수봉기(刘店秋收起义)를 발동하였고 선후로 공산당이 령도하는 중국 최초의 현급 로농혁명 정권인 확산현림시치안위원회와 하남성 첫 현급 쏘베트정권―확산현혁명위원회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하남성 첫 혁명무장인 확산현 농민혁명군(그 후의 예남로농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이로써 하남성 토지혁명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그는 확산현 농민혁명군 총지휘, 확산현 농민협회 위원장, 림시치안위원회 주석대리, 예남 특별위원회 위원 겸 신양현당위 서기를 력임하였다.
1928년 후에는 하남, 동북 등지에서 비밀혁명 사업에 종사하였다. 5차례나 체포되여 감옥에 들어갔으며 여러차례 혹형을 받으면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1929년 봄, 양정우가 동북으로 이동하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는 그를 파견하여 중국공산당 무순 특별지부 서기로 임명하였다. 1932년 11월 양정우는 남만으로 파견되여 중국로농홍군의 경험에 따라 당지 유격대를 정돈하고 중국로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를 조직하였으며 정위를 맡았다. 1933년 9월 18일, 중국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의 토대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를 설립하였고 양정우가 사장 겸 정치위원을 맡았다. 1934년 11월 7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이 정식 창립을 선고하였고 양정우가 군장 겸 정치위원을 맡았다. 1939년 양정우는 자신이 경위려(警卫旅)를 거느리고 몽강일대에서 전전하면서 홀몸으로 적들과 5주야를 싸웠다. 1940년 2월 23일, 길림성 몽강현 삼도외자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1946년 동북민주련군 통화지대를 양정우지대로 개칭하고 몽강현을 정우현으로 개칭하였다.

양정우렬사릉원은 1954년에 설립되였고 부지면적이 2만평방메터이다. 릉원 중앙에는 양정우 장군의 동상이 자리해있다. 렬사릉원의 건축물은 도합 다섯개인데 모두 고전식 유리기와 건축물에 속한다. 정면은 릉당과 묘실이 있고 량측의 편전은 양정우 장군 생애 업적 전시관이다. 렬사릉원 계단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였는데 첫번째 부분은 35개의 계단으로 구성되여 양정우 장군의 35세 빛나는 로정을 상징하고 두번째 부분은 11개의 계단으로 구성되여 양정우 장군이 동북에서 사업하고 투쟁한 11년을 상징한다.

왕덕태 장군

왕덕태는 1907년 5월 23일, 료녕성 개평현(지금의 개주시)에서 태여났다. 1926년 길림성 연변으로 이주했다. 왕덕태는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그해 12월에 연길현반제동맹 조직부장을 맡았다. 1932년초, 로투구탄광에서 로동자운동을 조직하면서 탄광의 반제동맹 서기를 담임했다. 1932년 봄에 연길현 로투구항일유격대에 입대해 반장을 맡았다. 이해 가을 상급의 지령에 따라 삼도만에 파견되여 산림대를 분화, 쟁취하는 사업에 진력했고 그해 겨울 20명의 사병을 설복해 연길현항일유격대에 참가하게 했다. 그 후 선후로 유격대의 소대장, 중대장, 대대참모장, 대대정위를 력임했다. 그리고 현위의 령도하에 왕우구, 석인구, 삼도만, 위자구 등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했다.

1933년 9월 중공동만특위 위원, 군사부장으로 임명돼 동만 각 현 유격대의 군사투쟁을 령도했다. 1934년 3월 하순 동만 각 현 항일유격대 간부회의를 주최했다. 회의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의 건립을 결정하고 왕덕태를 독립사 정위로 임명했다. 6월 동만특위림시집행위원회 위원을 담임하고 전반 동만지구의 군사투쟁을 지도했다. 독립사를 이끌고 구국군의 협력으로 선후로 안도현 대전자, 돈화현 따푸차이허, 안도현성, 삼도만, 로투구, 왕청현 대전자 등을 공격하는 전투를 펼쳤으며 안도, 연길, 왕청, 녕안, 돈화 등 지역에서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했다. 1934년 8월 십여갈래 반일부대의 수령들은 안도에 집결해 련합지휘부를 내오고 왕덕태를 총지휘로 추대했다. 1935년 3월 하순 독립사 사장으로, 이해 5월 30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군장으로 임명됐다. 1936년초 동북반일련합군 제5군과 회합하여 동만과 길동 지구의 당조직과 제2군, 제5군과의 련계를 이어놓았다. 그해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됐고 왕덕태가 제2군 군장으로 됐다. 이해 7월에 동북항일련군 제1, 2군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으로 통합됐다. 왕덕태는 제1로군 부총사령으로 , 중공남만성위 위원으로 임명됐다. 1936년 11월 7일, 몽강현 소탕하촌(현재 강원현 소속)전투에서 장렬하게 희생됐다.

강원구혁명렬사릉원(덕태릉원)은 길림성 백산시 강원구 서쪽에 위치해있다. 릉원의 부지면적은 2만 9000평방메터이고 화강석암으로 만들어진 왕덕태 장군의 거대한 조각상이 놓여있다. 광장으로부터 묘구역까지 29개 계단으로 됐는데 이는 왕덕태 장군이 일본놈들과 용감히 싸우다가 희생된 29살의 나이를 상징한다. 릉원은 혁명선렬의 높은 산, 큰 강물처럼 기세가 웅장한 영웅기개를 과시했다.

리홍광 장군

1910년, 조선 경기도 룡인군 단삼동의 한 빈농가정에서 태여난 리홍광은 15살 되던 해에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에 못이겨 부모를 따라 중국 길림일대로 이주했고 1926년에 길림성 이통현 류사취자툰(流沙嘴子屯)에 정착했다. 1927년 리홍광은 농민동맹회에 가입하였으며 1930년 3월에 이통현 삼도구에서 로동농민적위대를 세우고 대장을 담임하였다. 1930년 8월, 중공반석현위가 설립된 후 리홍광은 적극적으로 진보활동에 참가하여 당지 당조직의 신임을 얻었다. 이해 그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단원으로 되였으며 9월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 8월, 중공만주성위는 군중항일투쟁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반석중심현당위를 건립하고 중심현당위가 령도하는 쌍(양)이(통)특별지부를 내왔는데 리홍광이 특별지부 조직위원을 담임하였다. ‘9.18’사변 후, 리홍광 등은 전문적으로 한간을 징벌하는 ‘개잡이대’를 내왔는데 리홍광이 대장을 담임하였다. 1932년 2월, 그는 반석중심현당위 위원으로 전근되여 반석적색유격대 대장을 담임하였다. 같은 해 4월, 그는 반석 ‘4.3’반일폭동을 친히 조직하고 령도하였다. 1932년 6월, 중국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동북 첫 항일무장-만주로농반일의용군 제1군 4종대가 반석지역에서 설립되였는데 리홍광은 대부(队部)에서 사업하였다. 그 후 의용군은 중국로농홍군 제32남만유격대로 개칭되였으며 양정우가 대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교도대 정위를 담임하였다. 1933년 9월, 남만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로 개편되고 양정우가 사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군참모장 겸 제1사 사장을 담임하였다. 1935년 5월 상순, 리홍광은 부대를 거느리고 일본괴뢰군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 리홍광의 4명 경위원이 즉시 그를 담가에 메고 동쪽의 산등성이를 넘어 환인현 해청화부락으로 호송하였다. 그러나 상처가 엄중하여 구급치료를 하였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이튿날인 1935년 5월 12일, 남만에서 25세를 일기로 희생되였다.

리홍광기념관은 건축면적이 300평방메터인데 모두 4개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분은 ‘민족의 총아’를 주제로 리홍광의 가정사 및 강을 넘기 전의 전투사적을 소개하였다. 제2부분은 ‘일본침략자를 항격하여 남만에서 피 흘려’를 주제로 리홍광의 도강 직후의 항일투쟁사를 소개하였다. 제3부분은 ‘홍광정신으로 군혼을 주조’를 주제로 리홍광지대와 일본침략자가 싸운 장려한 시편을 소개하였다. 제4부분은 ‘초심을 잃지 않고 홍색유전자 전승’을 주제로 홍광정신이 어떻게 홍광중학교에서 전승과 홍광중학교 최근년간의 홍색문화 발굴 및 홍색유전자 전승을 통하여 이룩한 성과를 소개했다.

진한장 장군

진한장은 1913년 6월 14일, 길림성 돈화현에서 태여났다. 돈화현 사립오동중학을 졸업한 그는 1932년에 왕덕림의 국민구국군에 가입하여 전방사령부 문서처에 있다가 전방사령부 비서를 담임하였다. 이해에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4년에 북평, 천진 등지에 파견되여 국민당의 항일투쟁 상황을 료해함과 동시에 동북항일을 위한 모금활동을 하였다. 이해 5월에 구국군을 떠나 6월에 중공녕안로농의무대 정치지도원을 담임하였다. 1935년 2월에 동북항일련합군 제5군 제1사 정치부 주임, 군위 위원을 담임하다가 얼마 후 제2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여 부대를 이끌고 수녕일대에서 작전하였다.
1936년초에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2사(7월에 제5사로 개칭) 참모장, 사장대리 직무를 맡았으며 그해 9월에 중공도남특위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37년 5월에 제2군 제5사 사장을 담임한 그는 부대를 이끌고 왕청, 훈춘, 동녕, 돈화, 도문, 녕안, 액목 등지를 넘나들며 적들과 싸웠다. 1938년 7월에 부대를 이끌고 동북항일련군 제4, 5군 일부와 함께 서정도중에 경박호수력발전소 일본수비대를 돌연습격하여 수력발전소 건설 공사를 중지시켰다. 1939년 7월에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 지휘를 담임하였다. 그해 8월에 제2방면군 일부 및 제5군 일부를 거느리고 대사하전역을 벌이여 대승을 거두었다. 9월에는 돈화한총령매복전을 지휘하여 일본군 소장 마쯔시마를 사살하였다. 1940년에 부상을 입은 몸으로 부대를 이끌고 돈화, 녕안 등지에서 항일을 견지하다가 12월에 녕안현 소만만구밀영전투에서 희생되였다.

진한장 장군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고 장군의 수급과 몸체를 고향에 합장하기 위하여 돈화시 당위와 정부에서는 2000만원을 투자하여 2013년 6월에 릉원을 세웠다. 2013년 6월 13일에 진한장 장군의 수급과 몸체 합장식이 정중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되였다. 총면적이 1만 7650평방메터에 달하는 릉원은 비림구(碑林区), 조각상, 기념비, 렬사묘로 이루어졌다. 정문은 높이가 10.1메터로서 새 중국의 창건을 위하여 선혈과 생명을 바친 진한장 장군의 거룩한 넋을 기념하기 위한 의미가 부여됐다. 기념비 높이는 19.13메터이고 동서남북 사면에 각각 27개의 계단을 만들었는데 이는 1913년에 태여나 27세에 희생된 장군을 기념하기 위한 뜻을 의미하였다. 백산영혼주제기념관에는 100여점에 달하는 항일전사들의 유물, 전리품과 귀중한 사진이 소장되였다. 또 여기에는 불타는 애국심을 품고 붓대를 총대로 바꾸어 전장에서 피 흘리며 싸웠고 마침내는 고향으로 돌아와 안식하게 되는 장군의 백년 전기가 담겨져있다.

동장영 렬사

동장영은 1907년 11월 안휘성 종양현 종양진에서 태여났다. 자는 찬화이며 일명 장수화, 장장영이라고도 부른다. 1921년에 안휘성립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고 재학시절에 안경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안경시학생련합회 지도성원으로 있었다. 1925년에 일본 도꾜제국대학 예과제1고등학부에서 공부하였으며 이 무렵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6년에 일본 도꾜중공특별지부의 지도성원으로 선거되여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일본류학생과 재일화교중의 애국력량을 쟁취하고 단합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1928년 5월, 제남참사발생 후 일본류학생을 이끌고 항의활동을 벌리여 일본당국에 체포되였다가 두달 후 석방되여 귀국하였다. 일찍 중공상해시 호중구위 서기를 담임하였고 1929년에 중국좌익작가동맹창립에 참여한 발기자의 한사람이다. 얼마 후 당중앙의 파견을 받고 선후로 중공하남성위 서기, 천진시위 서기, 대련시위 서기를 담임하였다.

1931년 11월에 중공동만특위 서기로 부임된 그는 당조직을 발전시키는 데 정력을 몰부었다. 그의 노력으로 1933년 3월에 동만지구의 당원수는 1200여명에 달하여 동북당원수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당령도하의 항일무장을 일떠세웠는데 1933년 10월에 이르러 동북항일유격대원의 총수가 700여명에 달하였다. 동만 4개 현에 또 십여개 항일근거지를 창설하고 근거지대중들을 동원하여 반일회, 부녀회, 자위대와 소선대 등 반일대중단체에 참가시켰다. 그리고 근거지내에 또 항일정권을 건립하였으며 각 현의 항일투쟁을 지도하기 위해《투쟁》,《두갈래 전선》, 《전투일보》, 《반일보》와《소년선봉》등 여러가지 간행물을 꾸리기도 하였다. 1943년 3월 21일에 왕청현 동광진 묘구촌 대북골에서 적들과 작전하던중 희생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동장영렬사릉원(기념관)은 2011년에 세워졌다. 2013년에 왕청현 당위와 정부에서 더 투자하고 릉원을 보수, 증축한 데서 현재 총부지면적이 2500평방메터에 달하였다. 릉원은 동장영기념관, 동장영렬사기념비, 릉원묘지구역, 릉원광장 등 4개 부분으로 구성되였다.
동장영렬사릉원(기념관)은 주당위 당사(애국주의)교양기지로서 이미 중공연변주위 조직부, 선전부, 당학교와 규률검사위원회 등 부문으로부터 전 주 당원교양기지와 청년간부양성반 학원 교양기지로 확정되였다. 
작가:정영철 김철 편집: 사진:엄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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