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의 충혼


날짜 2020-07-23 14:53:37 조회


란휘 동지는 시종 당과 인민의 사업을 마음속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았습니다. 그는 생명으로 당의 군중로선을 실천한 훌륭한 간부이며 새시기 공산당원의 모범입니다. 광범한 당원간부들은 그의 견정한 신념과 당에 충성하는 정치적 품성, 군중을 마음에 두고 인민을 위해 책임을 다하는 공복정신, 자기를 잊고 사업하며 실무적으로 진취하는 직업정신, 공리를 위해 사리를 극복하고 과감히 책임지는 숭고한 품성을 따라배워 취지의식을 확고하게 수립하고 자각적으로 실무를 연찬하고 청렴해야 하며 본보기역할을 더욱 잘 발휘하면서 실천과 인민, 력사의 검증을 이겨낼 수 있는 실적을 부단히 창조해야 합니다.

-습근평

회족, 사천 북천사람,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선후로 사천성 북천 공청단현위 부서기, 서기와 통구진당위 부서기, 진장, 당위 서기 및 현정부 판공실 주임, 부현장 등 직무를 력임하였다. 그는 시종 당과 인민의 사업을 마음속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생명으로 당의 군중로선을 실천한 새시기 공산당원의 모범이다. 2013년 5월 23일, 기층에 내려가 사업하던 도중 불행히 절벽에서 추락하여 순직하였으며 ‘전국 우수공산당원’, 전국 ‘인민이 만족하는 공무원’ 칭호를 수여받았다.

172센치메터 키에 체중은 60킬로그람, 언제나 낡은 청바지차림에 밭머리를 누비는 란휘를 어느 평범한 촌마을의 농민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정부 판공실 주임으로 있을 때 그는 이미 일벌레로 소문이 자자했다. 부현장이 된 후 사업에 대한 열정이 더욱 높아졌다.관리에서 어려운 점이 많은 교통, 안전… 일반적으로 금방 승진한 부현장에게 단련기회가 되는 사업들이다. 그때로부터 란휘는 항상 잠 못 이루는 사람으로 되였다.

실무적인 직업정신
안전사업에서 가장 간고한 지역은 북천이였다. 지진 때 흔들렸던 이 지역의 산, 도로가 모두 안전위험이 존재했다. 90% 교량이 정도부동하게 피해를 받았고 20개 향진의 도로가 단절되였으며 262개 촌마을에 교통이 통하지 않아 전면적인 보수작업이 진행중에 있었다. 전 현 1800킬로메터에 달하는 신축, 개조 도로 모두 란휘의 시름거리였다.
도로사업을 확실하게 틀어쥐기 위해 란휘는 ‘도로건설 기술표준과 시공규범’, ‘향촌도로건설수첩’ 등 문건을 보풀이 일 정도로 읽으며 내용을 손금보듯 장악했다. 그의 차에 항상 준비되여있는 곡괭이는 필수품인데 란휘가 이미 마무리된 도로건축현장에서 질검사를 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란현장은 문제가 보이는 도로를 발견하면 언제나 친히 곡괭이로 길을 뚜져보면서 확인해야 시름을 놓습니다.”
란휘를 따라 동분서주해온 운전수 진방청의 말이다. 진방청이 모는 차에 앉아서 란휘는 3년 동안 도합 24만킬로메터의 거리를 달렸다. 매일 평균 200킬로메터, 북천지역을 세바퀴 도는 정도의 거리이다.
“차가 달리던 도중 란현장은 쩍하면 ‘차를 세우시오!’ 라고 합니다. 십중팔구는 문제를 발견한 경우입니다.”
어느 한번 한창 시공중인 도로를 지나던중 란휘가 차를 세웠다. 이미 포장한 도로면을 자세히 점검해본 그는 시공대표를 찾았다.
“설계표준에 따라서 시공한 게 맞습니까?!”
시공대표가 어물어물 둘러대려고 하자 란휘는 차에서 곡괭이를 꺼내 포장도로를 뚜져낸 후 자로 두께를 쟀다. 과연 설계표준과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런 장면을 수없이 보아온 진방청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그럴 때마다 저으기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미움을 사는 일이였으니깐요. 그러나 란현장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군중의 생명 재산, 안전과 관계되는 대사인데 부실공사를 눈감아주었다가 수많은 군중들의 미움을 사는 것보다 눈앞의 이 몇사람의 미움을 사는 게 백배 낫다는 겁니다.”
북천의 두 탄광의 안전생산도 역시 큰 문제였다. 평소 안전감독을 강화하기 위해 란휘는 친히 검사일군들과 함께 300여메터 되는 탄갱에 직접 내려가 검사사업을 지도하군 했다.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면 죽어도 탄갱에 안 내려간다.”며 주변에서 말릴 때면 란휘는 이렇게 말했다.
“석탄채굴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안전감독사업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평소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불리우는 란휘였다. 사람들의 인상에 그는 “대화를 할 때도 너무 겸손해서 대방보다 한급 낮은 사람이겠구나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누군가 사업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생기면 그는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바뀐다. 란휘가 사회하는 각 부문 회의는 ‘대신 참석’이 절대 용허되지 않는다. 회의통지에 따라 국장이 참가해야 하는데 부국장이 대신 참석하면 란휘는 엄숙하게 그 부국장을 돌려보낸다.
“돌아가 국장에게 말하시오. 우리 회의는 대신 참석을 거절합니다.”
지각도 절대 용허 못하는 사항이다. 규정시간이 되면 회의실 문을 닫아건다. 3, 4분 지각한 참석자들에게도 란휘는 하나같이 축객령을 내린다. 이렇듯 란휘의 수하에서 ‘문제인원’들은 절대 배겨내지 못한다.
“안전사업을 란휘에게 맡기면 천만번 시름을 놓을 수 있습니다.”
현당위 서기 류소민의 감탄이다. 북천지역의 안전사업 성적은 고무적이다. 온갖 위험이 존재하고 구역도 상대적으로 넓은 이 지역에 그동안 중대안전사고가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게 유력한 증거이다.

인민의 공복으로
공복정신은 관료주의에 대한 반발이자 우수한 공산당원의 정신적 기둥이다. 란휘는 시종여일하게 군중의 사사건건을 마음에 두고 묵묵히 공복정신을 실천해왔다.
사천지진 이후 삼륜인력거로 생계를 이어가던 모군현은 70여명 동료들과 함께 북천의 현성으로부터 림시현성 안창진에 왔으나 안창진 원유 삼륜차업종의 배척을 받아 고민이 많았다. 하는 수 없이 인력거군들은 모군현을 대표로 내세워 현신소처리국에 찾아왔다.
“이 일은 란휘 현장이 관할하는데 오늘 란현장이 산으로 사업검사를 내려갔습니다.”
사업일군들의 말에 인력거군들이 수근거렸다.
“오늘 란현장을 만날 수 없겠습니까? 우리도 사면팔방에서 한번 모여오기가 어려운데…”
멀리 관내에 있던 란휘는 사업일군의 전화를 받자마자 부랴부랴 귀로에 올랐다. 오후 1시가 넘어 현성에 도착하자 신소처리국 사업일군들이 먼저 점심식사라도 하라고 권고했지만 란휘는 모여온 군중들을 보면서 말했다.
“이렇게 많은 군중들이 한나절 기다렸는데 일단 좌담회부터 합시다.”
란휘는 즉석에서 교통대대 대대장과 운수관리소 책임자를 부르고 정부판공실, 신소처리국 사업일군들에게 필기를 잘하도록 배치했다.
“여러분, 떠들지 말고 속심말이나 요구가 있으면 한사람씩 말해주십시오. 이렇게 떠들면 우리가 제대로 기록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종합한 후 현에서 토론을 거쳐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날 란휘는 당장에서 70여명 인력거군에게 자신의 휴대폰 전화번호를 공개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수시로 전화하십시오. 인력거 일을 계속 하되 꼭 안전에 조심해야 됩니다. 사고라도 나면 원래 어려운 가정에 큰 일이 아닙니까?”
란휘의 휴대폰에는 보통 군중들을 포함한 2000여개 번호가 저장되여있다. 일반 농민공, 생활형편이 가난한 친구들이 바로 이렇게 그의 생활권에 들어온 것이다.
현에서 토론을 거친 결과 안전을 고려하여 금후 삼륜인력거를 취소하기로 했다. 이에 불복한 모군현은 여전히 삼륜차를 몰고 거리에 나갔다가 교통경찰에게 삼륜차를 압수당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모군현은 자기 사무실로 왔다가라는 란휘의 전화를 받았다. 알고 보니 란휘가 수소문하여 현서류관에서 수직을 서는 일을 찾아주었던 것이다. 수습기간 7일,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책임감이 강한지라 모군현은 인차 정식계약을 체결하여 일자리를 해결했다. 그 후에도 란휘는 직접 전화를 걸어 “서류관의 사람들이 잘 대해주는가? 사업압력은 큰가?”고 문안까지 했다.
“나 같은 보통 백성마저 이렇게 까근하게 대해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나의 생활, 나의 사상 지어 나의 가족까지 세세히 관심해주는데… 란현장은 정말 나의 모든 것을 개변시켰습니다.”
취재를 받을 때 모군현은 수차 눈물을 금하지 못했다. 그러나 란휘의 장례식에 참가할 때에야 그는 란휘를 애석해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결코 자기 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뢰고진 농민 리선성 역시 모군현처럼 란휘의 장례에서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중의 한명이다. 추도식에 참여할 자격이 없을가 근심되여 그는 현정부에 청구메시지까지 보냈다고 한다.
당시 신소길에 올랐던 리선성은 안창진에서 란휘를 만났다.
“너무 점잖고 부드러웠습니다. 먼저 성씨를 물어보더니 형님이라 부르더군요. ‘나도 대지진의 조난가정입니다. 모친이 무너지는 집에 깔려 돌아갔는데 시체마저도 찾지 못했습니다. 참 동병상련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정부에서 될수록 방도를 대서 해결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우리 가정 형편을 꼬치꼬치 캐여물었습니다.”
그번에도 란휘는 “곤난이 있으면 전화하십시오.” 하면서 리선성에게 전화번호를 남겨주었다. 얼마 후 란휘는 향에 전화를 걸어 리선성을 대신하여 림시구조금 1000원을 신청해주었고 그 후에도 시간이 나면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했다.
“때로는 급이 낮은 간부를 만나는 것도 하늘에 오르기처럼 어려운 일인데 란현장은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 란현장만 찾으면 다 해결될 것만 같았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신념은 육체의 강대함을 지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란휘는 장기간 치질, 저혈압 등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시종 일터를 고수하면서 직책을 다하였다.
“그날 란휘는 전화를 걸어와 치질 때문에 힘든 고민을 터놓군 했습니다. 치료를 권했지만 늘 사업 때문에 뒤로 미루군 했습니다.”
20년 지기 친구로 지내온 안전감독국 국장 진국흥은 병으로 힘들어하는 란휘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장기간 중약으로 치료하다가 약효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면양제8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병세가 엄중해져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완쾌하기까지 한달간, 란휘가 병원에서 푹 쉴 수 있으리라 진국흥은 생각했건만 실을 풀고 상처자리에서 여전히 피가 흐르는 상태에도 란휘는 퇴원책임서에 싸인하고 다시 사무실에 나타났다.
며칠이 지난 후, 북천지역에 폭우가 있다는 기상예보를 접한 란휘는 점적주사 바늘을 뽑아버리고 교통, 안전검사 사업일군들과 함께 위험조사, 조사연구에 나섰다. 험준한 차기령을 거쳐 선평향의 산세와 소방촌의 언색호까지 까근하게 점검하고 귀로에 오른 일행, 환호로를 통해 지세가 가파로운 마령암부근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오후 3시경이였다. 중도에 여러번 약을 바꾸느라 신경을 썼지만 란휘는 증세가 심해져 식은땀을 흘리며 참기 어려웠다.
“차를 세우시오. 약을 바꿔야겠소.”
동행한 간부들이 차내에서 약을 바꾸라고 권고했지만 란휘는 끝내 차에서 내려 편벽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동행인원들은 체위성 저혈압으로 현기증을 느끼다가 평형을 잃고 50여메터 되는 벼랑에서 추락된 란휘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누군가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다.”는 말이 있다. 북천의 관내, 관외 간부군중들도 오래동안 이러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2013년 7월, 산홍수가 터졌을 때 진국흥은 휴대폰을 꺼내 생각없이 란휘의 번호를 누르기도 했고 란휘의 딸애 신이도 돌아간 부친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북천의 간부들은 우수한 지도자를 잃은 슬픔에 모대기면서도 결코 란휘를 신격화하지는 않는다. 마치 란휘가 그들의 일상에 여전히 존재하기라도 한 듯…
“여기 수많은 간부들은 지금 란휘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리혜숙 편역
작가: 편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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